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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시화 시인 / 새해 결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4.

류시화 시인 / 새해 결심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하지 말 것

'논 숨 콸리스 에람 -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 말을 수첩 앞장에 적어 놓을 것

물을 더 많이 마실 것

길이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잊고 여행할 것

자서전은 직접 써내려 갈 것, 다른 사람이나 운명이 대신 쓰게 하지 말고

가슴이 원하는 것이면 할 것

바깥으로 넓어지고 안으로 깊어질 것

신발에 들어간 돌을 다 털어 내지 말 것, 그 불편함이 나의 존재감을 증명해 줄 것이므로

두 꽃 중에서 폭풍우를 이겨 낸 꽃을 선택하고, 두 거짓말 사이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거짓말을 선택할 것

많은 해답을 가진 사람을 멀리 할 것, 그 대신 상처 입은 치유자와 걸어갈 것

자신은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기억할 것

나뭇가지를 신뢰하는 대신 자신의 날개를 신뢰할 것

음정이 약간 어긋난다고 해서 내 노래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자신에게 말해 줄 것

거친 바람에 저항하며 날갯짓하는 쇠기러기 보면서 세상의 무엇에 맞서며 나는 살아가고 있나 생각할 것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더 많은 불행한 사람이 있고, 치유된 상처가 있으면 더 많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잊지 말 것

계획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는 대신, 계획에 없던 일들을 더 많이 준비해 달라고 기도할 것

하루에 한 번은 회전하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 한 송이 꽃처럼 고요히 앉아 있을 것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든 밤마다 함께 보내는 연인을 둘 것, 그 연인이 시든 책이든 음악이든

올해의 마지막이 그다지 나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을 것

 

 


 

 

류시화 시인 / 눈 위에 쓴 시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류시화 시인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류시화 시인

1958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본명: 안재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80년 시 〈아침〉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 1988년부터 미국,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거나 인도 여행을 하며 라즈니쉬의 명상서적을 번역했다.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2012)를 출간. 경희문학상(2012)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