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석 시인 / 사유
봄이 오기 전까지 생각만 하고 있다 생각은 씨앗이므로 목이 앞으로 길고 옆으로도 길어진다 씨앗은 먼 과거 억겁을 거쳐 왔으므로 뒤를 돌아보다가 목이 뒤로도 길어지고 있다 겨울이므로 생각밖에 할 수 없다 힘은 얼어 있고 문밖은 나갈 수가 없다 발생하지 않아도 나는 사람이며 존재한다 봄까지 가서 꽃을 피우지 않아도 존재한다 투명하게
겨울은 잠의 계절이고 끝나지 않는 꿈을 꾼다 꿈만 꾸면서도 살 수 있다 신은 바깥에 있지 않듯 봄도 바깥에 있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 묻는 사람에게 나를 기다립니다 자주 이렇게 창밖을 내다보며 나를 기다립니다
내가 실존하고 있느냐에 대해 학생들이 공동 리포트를 썼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도 시간은 흐른다.'
‘꽃의 모양새만큼 복잡한 감정을 건너야 한다.'
두개의 의견이 나왔다
나는 창고에서 세상과 좀 더 가까운 창고로 햇볕이 잘 드는 위치로 끊임없이 옮기고 있다
허구 같은 몸올 아주 작게 하여 뿌리에 머물고 있다 시간의 바로미터 앞 밤을 지나고 있다 서성이는 발걸음 사이로 먼지 몇 알갱이 부유하겠지만 가시거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집 《장미의 은하》중에서
박춘석 시인 / 나는 누구십니까?
어떤 햇살의 부름을 받고 외출하듯 태어났습니다.
나는 나의 양피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나의 세상을 낳는 어머니였습니다. 나만의 하늘과 땅이 있고 나와 해와 다양한 기후가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미래이고 미래의 그림자입니다. 살아야 할 날들은 모두 내가 발견해야 할 나입니다. 나의 배후에는 역사라는 신이 있고 미래라는 빈 땅이 있습니다. 나의 발은 나의 심부름꾼입니다. 발을 옮기는 건 나를 옮겨 나를 찾아가는 일입니다. 내 몸에 든 빛을 꺼내어 피었고 빛을 깨트리며 시들었습니다. 계절과 시차가 다른 곳, 다른 별에서 살고 있는 나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습니다. 불편한 생을 탈출하듯 떠나왔고 행복한 생을 더 향유하기 위해 떠나왔습니다. 생명의 기억, 말랑한 지층이 너무 많은 창고를 지어 숨겨둔 탓에 스스로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다 만날 수 없는 ‘나’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짐승을 원한 적 없지만 짐승이 뛰쳐나왔고 꽃이 뛰쳐나왔고 길을 대답하는 노인이 뛰쳐나왔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뛰쳐나왔습니다. 나는 다종의 생명이 사는 커다란 집입니까? 나는 기억입니까? 맨 처음 발걸음 떼면서부터 물었습니다. 물음표를 좇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발걸음은 어떤 선견지명이 있어 숨어 있는 나를 만나러 가고 있습니까?
아직 질문의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발걸음이 발견한 대륙 계절 몇 개를 건너왔을 뿐입니다. 나는 누구십니까?
박춘석 시인 / 일기
나의 온기가 남아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뒷모습이며 내가 묻혀 있는 무덤이다 오늘이 있어 나는 현현되었다 오늘의 소멸로 나는 해방되었다 오늘은 꽃병이고 나는 꽃이었다 몸이 없는 오늘에 내가 몸을 부여했다 지금의 나는 꽃의 무량한 힘이다 책갈피에 끼워져 말라가는 꽃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곳에는 해와 기후와 풍경을 이루는 사물과 내가 함께 살다 함께 묻힌 곳이다 이곳을 내가 기억하는 전생이라고 해도 될까
이곳에는 그림자들의 법칙이 있다 오늘은 오늘을 부정했고 내 발걸음은 나를 부정했고 하늘에 떴던 해도 내리던 비도 존재를 감춘 곳이다
수많은 오늘, 수많은 꽃병들이 나를 시들게 하여 여기 이곳은 꽃이 시드는 계절 그림자들이 흘러와 갇히는 강 사라진 것들이 모여와 사는 곳
사라지는 꽃병이 있어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나를 기록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그냥 사리진 내가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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