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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학성 시인 / 밀봉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5.

이학성 시인 / 밀봉

 

 

아우르던 내 벗들은 모두 떠났다.

남겨진 자의 책무는 記錄,

그래서 매일 밤 밀서를 새긴다.

쓰다만 말들로 청승맞은 술병을 달랜다.

만나지 못하여 서운하련가,

한때는 지독하게 아름다웠노라.

누굴 대신 증인으로 세우겠는가.

그러니 기록은 케케묵은 밀봉으로 남겨지리라.

천천히 서두르며 따르고 있다.

앞서는 이들아, 돌아다보지 말라.

 

 


 

 

이학성 시인 / 경우境遇

 

 

둘은 다정한 연인사이 같았다.

자리를 나란히 차지하고 앉아서도 쥔 손을 놓지 않았고

서로에게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사랑의 수렁에 빠진 이들은 닮아간다 하던가.

그래서인가 흡사하게 빼닮은 두 얼굴은 금방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럴 때다. 콩깍지가 눈에 씌어 상대방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그러니 앞에 선 노인을 놓치고 말았다.

가릉거리는 숨결에 꽤나 지척이었는데도

주고받는 밀어를 멈추지 못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저들이 내릴 때까지

서 있어야 했던 노인은

다른 이의 배려로 좌석을 양보 받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더러 실수가 있는 법,

하지만 거듭되는 일이라면 용납하기 어렵다.

목격한 실상을 차근차근 내게 전한 이는

마지막 말에서 목소리를 떨며 약간 분개해 했다.

만일 자신이 사귀는 상대가

지하철 안의 그 사람이었다면, 불끈 주먹을 휘둘러

턱을 가격하는 시늉을 했거나

엉덩이를 걷어차며 단호히 그 자리에서 절교를 선언했으리라고.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시와반시》에서

 

 


 

 

이학성 시인 / 천상의 악기

 

 

 겸양한 이들이 아니고서는 그것의 소리에 젖기 어렵다 맨처음 그것을 지은 이가 밤의 고요를 사랑했으며 지나친 욕심을 바라지 않은 까닭이다 침묵의 신을 섬긴 이베리아반도의 무어 인들은 그것을 가리켜 별빛을 실어 나르는 악기라 했다 보해미아의 울창한 고원숲을 떠돌던 집시의 후예들은 셋을 세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악기라 했다 지독한 가난 탓에 피아노조차 살 수 없었던 젊은 슈베르트는 그것으로 다수의 악곡을 지어 달 떠오는 창가에서 연모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세간에 전하기를 지닌 것 없는 자의 악기, 고요를 적시는 밤의 기타여! 그것의 소리는 그만큼 불우했으나 천 날의 밤이 지나도록 여전히 사랑에 고개 숙이게 하고 저녁의 걸음을 단번에 멈추게 하고 황혼 깃들인 창가에서 따스한 별빛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이학성 시인

1961년 경기 안양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우를 살리기 위해』, 『고요를 잃을 수 없어』,  『늙은 낙타의 일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