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 시인 / 곰팡이 성명서
볕 들지 않은 사흘 만에 혁명은 시작되었다 들뜬 벽지가 투두둑 휘어져 내리고 습기에 못 이겨 부러지는 무게, 사과는 갈변했고 접시의 깨진 이는 돋았다 냉장고 밑으로 흘러나오는 결기가 필력으로 고여 드는 오전 열 시, 벽면 구석에서부터 무관심은 모의되었다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은 것만이 증식한다 방은 이제 곰팡이에 기생하려는지 모서리가 허물어질 때까지 짙푸른 영역을 점령 중이다 버려진 말들이 콘크리트 바닥까지 확장하며 부풀어 오르는데 창문의 표면은 포획된 홀씨로 단호하고 퀴퀴하다 구불구불 슬어 올라가는 문장들 가볍게 천장 구석구석 낭독해간다 사소한 포자들이 시커멓게 껴오는,
푸른곰팡이가 방문을 밀고 나오고 있다
이필 시인 / 웰컴, 시골시인
시골시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잘 가요, 황인숙, 이성복, 전윤호, 그리고 젊고 예쁜 도성 안 시인들이여 오늘은 연탄불고기 식당도 일찍 문 닫는 이름 불러 줄 이라곤 가까운 가족밖에 없는 그런 시인들 하나둘 모여 늦은 저녁, 빈대떡에 막걸리로 목 축이는 시간 창고 지붕 물받이는 세찬 바람에 삐걱거리고 자퇴서 낸 열일곱 막내도 곯아떨어졌다 낡은 시 뭉치 찾아 서랍 안을 뒤적이면 아내가 한쪽으로 돌아눕는다 내다버렸을까······ 부스럭부스럭 떨리는 손끝 비가 또 와요 누군가 깊어가는 어둠 속을 바라보면 말한다 그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나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두서없이 쓰인, 이 길고 장황한 연애시를 읽기 시작하는데 이미 발그레한 두 뺨은 연극적인 목소리로 점점 달아오르고 마지막 연은 행방불명— 어디서 낱장이 떨어져 나갔는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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