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로 시인 / 새의 셈
새도 셈을 한다 새떼 한번 쫓아 보시라 새대가리란 말,허투루 못 쓸 것이니
한두 마리는 손사래로 겁만 줘도 멀찌감치 달아나지만 서너 마리,너댓 마리는 다르다 예닐곱 마리쯤 되면 푸룩 몇 발치 가서는 째려보기도 한다 열 마리 넘으면 한 번의 시늉으로는 꿈쩍도 않고 소 닭 보듯 딴청이다 새도 분명 머릿수를 셈하는 것이다
새들도 어깨를 맞출 행렬이 있을 때 서로 믿는 구석이 있을 때 동지가 되는 것이다 뭉치면 사람 한둘 따돌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이런 법칙이 성립하겠다 한 번의 손짓에 새가 달아나는 거리는 머릿수에 반비례한다
설마?고개 갸웃하시면 당장 확인해 보시라 당신,완전 새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김형로 시인 / 나와 나무와 상처
나무를 자주 바라봅니다 상처 없는 나무는 없으니까요
사라진 가지는 옹이로 박혀 있고 둥치는 패고 균형 안 맞는 늙은 몸피의 나무를 더 자세히 봅니다
내 몸에 이런저런 흔적이 늘어갑니다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큰 나무 곁에 무연히 기대봅니다 수고 많으셨다 잠시 다녀가는 내가 인사합니다
놀랐을 겁니다 엊그제 작은 아이였는데…
당신을 보듬으면 말 없는 위로가 수액처럼 퍼집니다
내 마지막 집은 상처 많은 나무였으면 좋겠습니다
김형로 시인 / 감태나무를 통과하다
한동안 감태나무가 싫었습니다 누렇게 겨울 가지 매달린 마른 잎들, 결기 없다 생각했지요 떠나야 할 때 머뭇거리는 미련 말입니다
아니다 싶으면 떨어졌습니다 마뜩찮은 세상을 끊어냈지요 붙기는 커녕 떨어지는 데는 이력이 난 묵처럼 뚝,뚝 끊어낸 내 몸의 떨켜들 훈장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보았습니다 칙칙했던 잎들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 새잎 돋아나 있었습니다 겨울바람에도 붙어 있던 아귀 같던 것들이 노랑연두에게 슬며시 자리 내주고 떠난 것입니다
삭은 뼈 떨구고 별을 매단 봄날의 감태나무 아래서 나를 고쳐 씁니다 부여잡았던 그 손목들, 봄이었다고
바스라진 잎 주워 들었습니다 밀고 가는 강과 버티는 산을 봅니다 오늘은 내가 떨어질 줄 모릅니다
김형로 시인 / 말의 얼굴
어깨 뒤로 던지는 말이 있지 시간을 따라잡는 바람처럼 씽-소리 내며 꽂히는
밥은 먹고 다니냐 귓등으로 들었어도 귓전에 파닥이는 말이 있지 싸운 뒤
밖은 추워! 던져주는 말 오랫동안 머릿속 강대로 서 있지
훌치기낚시 고수처럼 밑밥도 없이 뒤에서 낚아 올리는 말이 있지
잘살고 있는 거지 옛 애인의 차진 안부처럼 돌아선
등에 걸려야 제격인 말이 있지 할 말 없을 때 슬쩍 안는
백 허그처럼 뒤에서 번져 오는 먼,뒤에서부터 따스한
얼굴 맞대고는 못 한다던 그 말 실은 말의 얼굴 때문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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