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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혁분 시인 / 루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5.

김혁분 시인 / 루머

 

 

 눈 씻고 봐도 잘 보이지 않는 바늘귀처럼 일상을 헛딛다 마음이 삐면서 알았다 내 삐걱이는 마음에도 그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으, 촘촘히 놓인 침상에 누워있을 때도 안간힘으로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내 난청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던 그의 하루가 한 달이 되고 6년이 되도록 그의 향방은 바늘 귀만 열어 놓은 여정이었다 안테나처럼 세워놓은 내 귀 어디쯤에서 그는 다시 이동 중일까 슬픔을 더듬다가 다시 그를 잃어버린다

 

 루머여도 좋았다 들려오는 모든  소식을 듣기 위해 귀를 열어 놓는다 침침한 눈에 바늘귀가 열리듯

 

-시집 『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지혜, 2019)

 

 


 

 

김혁분 시인 / 유리

 

 

너무 환해서

거기 그냥 벽이어도 좋았다

 

울타리처럼

 

 


 

 

김혁분 시인 / 도색

 

 

너를 절벽에서 날려 보냈다

 

도료처럼 무겁지 않게

더듬어 메울 수 있는 크랙마다 흔적을 지우듯 흩뿌렸다

자일을 끊어버리던 너처럼

그날은

침묵뿐인 자리라서,

벽을 꽃길처럼 걷다 보면 행복해질 거라고 했던가 내일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지만, 처음인 것처럼 우리는 줄을 잡고 벽을 오르내렸지 함께 했던 벽 위에 색색으로 짙게 바른다

정상까지 가자던 약속은 접어 두고

칠하고 칠하다 보면 붓질마다 손길이 겹쳐 종횡으로 페인트는 우리를 지우고 증발했다

모서리를 돌며 이 회색 벽까지만 칠하자

그날 절벽을 오르던 너처럼 머리끈을 질끈 묶는다

-계간 『애지』 (2022년 가을호)

 

 


 

김혁분 시인

충남 보령에서 출생. 2007년 계간《애지》에 <젓가락에 대한 단상> 외 4편으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 대전작가회의 회원. 애지문학회 회원. 시집; <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