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분 시인 / 루머
눈 씻고 봐도 잘 보이지 않는 바늘귀처럼 일상을 헛딛다 마음이 삐면서 알았다 내 삐걱이는 마음에도 그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으, 촘촘히 놓인 침상에 누워있을 때도 안간힘으로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내 난청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던 그의 하루가 한 달이 되고 6년이 되도록 그의 향방은 바늘 귀만 열어 놓은 여정이었다 안테나처럼 세워놓은 내 귀 어디쯤에서 그는 다시 이동 중일까 슬픔을 더듬다가 다시 그를 잃어버린다
루머여도 좋았다 들려오는 모든 소식을 듣기 위해 귀를 열어 놓는다 침침한 눈에 바늘귀가 열리듯
-시집 『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지혜, 2019)
김혁분 시인 / 유리
너무 환해서 거기 그냥 벽이어도 좋았다
울타리처럼
김혁분 시인 / 도색
너를 절벽에서 날려 보냈다
도료처럼 무겁지 않게 더듬어 메울 수 있는 크랙마다 흔적을 지우듯 흩뿌렸다 자일을 끊어버리던 너처럼 그날은 침묵뿐인 자리라서, 벽을 꽃길처럼 걷다 보면 행복해질 거라고 했던가 내일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지만, 처음인 것처럼 우리는 줄을 잡고 벽을 오르내렸지 함께 했던 벽 위에 색색으로 짙게 바른다 정상까지 가자던 약속은 접어 두고 칠하고 칠하다 보면 붓질마다 손길이 겹쳐 종횡으로 페인트는 우리를 지우고 증발했다 모서리를 돌며 이 회색 벽까지만 칠하자 그날 절벽을 오르던 너처럼 머리끈을 질끈 묶는다 -계간 『애지』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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