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시인 / 묘비명 나도 이제 내 묘비명을 쓸 때가 돌아온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아니 벌써? 하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다정하고 잔인했던 친구여,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었고 눈 덮인 길에는 핏자국이 찍혀 있다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이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살았는지 모른다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 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 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 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할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 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 무덤으로 실려갔을 때도 나는 집요한 문명이 발목 잡혀서 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 서커스의 소녀가 어는 한순간 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 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 되어 날아가며 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제 마지막 고별의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민영 시인 / 햇볕 모으기 이제부터 나는 햇볕을 사랑하기로 했네 그 옛날, 만주에 있는 우리 집 토담 밑에서 아편쟁이 중국노인이 때 묻은 저고리 풀어헤치고 뼈만 남은 앙상한 가슴에 햇볕을 그러모으며 졸고 있었듯이. 그러기에 눈 어둡고 고개 휘는 시절 앞에 선 나도 볼품없이 여윈 몸뚱아리에 햇볕을 조금씩 모아 담기로 했네 하늘에 매달린 용광로에서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생명의 불을 다소곳이 모아 간직하기 위해!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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