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흠 시인 / 어두워지는 풍경
어둠이 젖어들자 동네 길목은 불빛으로 환하다 늦게까지 하우스 수박 순을 따던 동네 아주머니들 몸뻬 차림으로 힘차게 돌리는 자전거 페달 소리 어둠에 잠겨가는 길을 재촉한다 후줄근히 땀에 배인 남정네들 몇몇은 윗동네에 하나 있는 점방 집에 모여 구워 온 곱창구이에 소주 한 잔 나누며 밤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농사일, 집안일을 털어놓는 동안 고달픈 하루 일도, 뻐근한 시름도 털어 버린다 형광등 불빛 반들거리는 가게를 나오면 주차장 근방에 오롯이 선 가지 다 잘리고 몸통만 남은 플라타너스가 어두운 잎눈으로 점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황흠 시인 / 턱걸이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어 에스 라인으로 힘차게 으라차차! 잡았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가는 거야
김황흠 시인 / 드들강
강에 머물러 바라보는 날이 많다
딴 때 같으면 고추 마무리로 고양이 손도 아쉬울 판 하우스가 물에 잠겨 일이 사라지고 나락을 베고 난 뒤 완전 백수
늘 그렇게 흐르고 흐를 뿐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해 싱거운 너나 보자고 매번 오지만
그래도 시들어 버린 풀에 눈 마주치고 마른 억새 숱에 지은 벌레집도 눈 맞춘다
그런 날이 길어지지만 엎치락뒤치락 뭉텅뭉텅 흘러가는 물살 소리가 봄물로 물든다고 속삭여 주려는지
아까부터 쇠백로가 목을 길게 추켜세우고 슬금슬금 쳐다본다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문학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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