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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호기 시인 / 숨소리의 문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5.

채호기 시인 / 숨소리의 문장

 

 

긴 호흡기관의 층계를 올라오는 숨소리

닫힐 듯 간신히 열리는 소리

정체 모를 타인의 숨소리

와 합쳐지고 좀 전의 숨소리

와 아득한 기억의 숨소리

가 뒤섞여 숨소리의 문장을 이룬다

어떤 단어는 들판의 풀잎에 돋아나

차가운 이슬방울로 모래 위에

떨어져 천천히 스며든다

어떤 단어는 이마의 땀구멍을 비집고

올라와 미간을 거쳐 코와 눈

사이의 계곡을 천천히 흘러내린다

어떤 단어는 바람이 되어 창틀의 소리를 내다가

멀리 황량한 들판의 소리를 낸다

어떤 단어는 끈적끈적한 어둠으로

덩어리가 되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른다

어떤 단어는 안개가 되어 공기를

포옹하고 연인의 심장을 포용한다

아! 사랑이란 단어

백사장 위의 하얀 조가비

주머니에 들어 손가락에 만져지는 글자

나! 바다, 파도라는 단어와 한 문장을 이루어

밤하늘의 별자리 같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사랑

사랑이란 단어를 듣기 위해

책장을 여는 순간 무거운

관 뚜껑이 열린다. 책이 관이라니!

긴 호흡기관의 층계를 올라오는

숨소리. 정체 모를 타인의 숨소리와 뒤섞인

숨소리의 문장이 들린다

 

 


 

 

채호기 시인 / 병든 저수지

 

 

비가 내린다, 역병처럼

햇빛에 반짝거리는 물방울 같은

초록잎 위에 붉은 핏방울.

비가 내린다,

 

검은 세상에 닿아

쥐털 같은 뻣뻣한 비가 내린다.

 

어두운 고랑을 타고 흐르는 쥐떼들이

검은 물처럼 고물고물거린다.

 

비의 주검들이 흘러 쌓이는

병든 저수지에

썩어들어가는 물의 살

이끼처럼 푸른 박테리아 꽃

 

너와 나의 가학적인 사랑처럼

支流에서 血流로 흘러드는 페스트

 

병든 내 몸에 항체처럼 네가 있듯이.........

 

 


 

 

채호기 시인 / 접착제

 

 

어떤 생각은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다.

생각은 귀 같다. 가끔 거울을 볼 때, 낯설은

이물 같은, 그러니까 얼굴과

뗄 수 없이 한 덩어리인 귀.

 

어떤 생각은 빠르고 귀찮은 애완동물인데,

어떤 생각은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

머리에서 꼼짝 않고 떨어지지 않는다.

 

나와 생각을 단단하게 붙이는 접착제는 뭘까?

생각하면, 생각은 점점 커지고 무거워질 뿐

생각은 내 몸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은 생각을 먹고 자라고

어떤 생각은 제자리에 붙어서도 수천 리를 갔다 온다.

하지만 끝까지 생각은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생각은 혹이나 티눈 같아서

내 몸 같지만 내 몸이 아니다.

어떤 생각은 어떤 생각을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접착제다.

 

칼로 썰거나 발로 짓밟아도

생각은 줄어들지 않고 내 몸만 아프다.

'더 시상 생각하지 말자'는 다짐도 생각.

 

다른 생각과 경쟁하고 다투고 맹렬해지는

생각은 한 번도 생각 밖의 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몸 밖의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다.

 

생각이 기생하는 몸은 감각이 무뎌진다.

허나, 이것도 생각이다.

 

 


 

채호기 시인

1957년 대구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대전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88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지독한 사랑』 『수련』 『손가락이 뜨겁다』 『줄무늬 비닐 커튼』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등이 있음. 제 21회 김수영문학상과 제8회 현대시 작품상 수상. 문학과지성사 편집장 및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역임.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