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천수호 시인 / 흰 눈의 장례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4.

천수호 시인 / 흰 눈의 장례식

 

 

잠깐 멈췄다

허공에 떠 있는 눈발처럼

 

신발에 묻은 눈을 털듯 가볍게 갈 수 있으려나

 

사람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몰라서

멀리서 온 눈은 창틀에 쌓이고

 

낯선 곳으로 가는 사람을 잠시 붙드는 듯 곡소리가 창에 와 부딪힌다

 

끓어오르는 곡(哭)

차분히 내리는 눈

유리창을 사이에 둔 눈과 곡

눈은 오래 그칠 줄 모르지만 곡은 자주 그쳤다가 다시 이어진다

 

곡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창가에 붙어 서서

지속이라는 말이 끌어왔던 기억의 시간들을

기념 꽃처럼 한 다발씩 뭉친다

 

눈과 곡의 관계를 헤집어도 좀처럼 맨땅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엔 비가 내린다지? 아니 여기도 눈이 와.

이런 대화 대신 잠시 쉬었던 곡이 다시 시작된다

 

곡이 울릴 땐 장미도 모르겠더니

눈발이 굵어지니 국화도 놓아버리고

꽃을 놓는 건 이 세상을 다 꺾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눈과 곡이 한 하늘 아래서

요술처럼 바로 서거니 거꾸로 서거니 하면

쏟길 건 쏟기고 쌓일 건 쌓이고

 

새것을 가져보지 못한 나의 크레파스는 흰 세상으로 덮을 줄 몰라서

색색의 색깔들을 뒤섞어 까만 밤을 불러들인다

 

밤이 오면 저 흰 눈들은 다 어쩌지

이런 걱정이나 할 때인가

얼른 꿈을 깨야지

 

문상객들이 눈 속으로 흩어진다

 

 


 

 

천수호 시인 / 저기는 아직 밝네요

 

 

여긴 깜깜해요

대문이 큰 3층 집과 그 마당을 반쯤 차지한 벚나무 줄기와

저층 아파트 베란다가 하나로 엮인

이 어둠을 어여 놓아요

 

벚나무는 아직 밝은 서산을 배경으로 잎의 어둠을 고백하고 있어요

요만한 내 어둠도 어둠이라 쳐주나요?

이런 고백

 

저긴 아직 밝아요

케케묵은 이야기를 뒤집어쓰고 얼얼하도록 뺨까지 한 대 맞은 그날처럼 환해서

꼭 저길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요

 

내 편에 서 있는 나무가 가지를 몇 개나 쑤셔 넣은 저 배경

저런 백지는 백치에 가까운 어린 날에나 필요했겠죠

 

이제 나는 조금 복잡해져서

창밖의 풍경에 내가 비쳐도 놀라지 않아요

내 얼굴에 초로의 할머니가 앉아 있어도 반갑기만 한 걸요

 

어둠이 하나로 묶은 차가운 이 돌덩어리를 내 것이라 눌러두어도

서쪽 하늘은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아요

저 밝은 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이쪽에서 먼저 불을 켜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에요

그 징조를 믿고 살아온 건 아니니까

언제나 왜 여기부터 어두워지는지

밝은 저쪽이 가끔은 궁금해요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대구 계명대 문에창작학과 졸업.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아주 붉은현기증』(민음사, 2009)과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