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호 시인 / 흰 눈의 장례식
잠깐 멈췄다 허공에 떠 있는 눈발처럼
신발에 묻은 눈을 털듯 가볍게 갈 수 있으려나
사람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몰라서 멀리서 온 눈은 창틀에 쌓이고
낯선 곳으로 가는 사람을 잠시 붙드는 듯 곡소리가 창에 와 부딪힌다
끓어오르는 곡(哭) 차분히 내리는 눈 유리창을 사이에 둔 눈과 곡 눈은 오래 그칠 줄 모르지만 곡은 자주 그쳤다가 다시 이어진다
곡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창가에 붙어 서서 지속이라는 말이 끌어왔던 기억의 시간들을 기념 꽃처럼 한 다발씩 뭉친다
눈과 곡의 관계를 헤집어도 좀처럼 맨땅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엔 비가 내린다지? 아니 여기도 눈이 와. 이런 대화 대신 잠시 쉬었던 곡이 다시 시작된다
곡이 울릴 땐 장미도 모르겠더니 눈발이 굵어지니 국화도 놓아버리고 꽃을 놓는 건 이 세상을 다 꺾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눈과 곡이 한 하늘 아래서 요술처럼 바로 서거니 거꾸로 서거니 하면 쏟길 건 쏟기고 쌓일 건 쌓이고
새것을 가져보지 못한 나의 크레파스는 흰 세상으로 덮을 줄 몰라서 색색의 색깔들을 뒤섞어 까만 밤을 불러들인다
밤이 오면 저 흰 눈들은 다 어쩌지 이런 걱정이나 할 때인가 얼른 꿈을 깨야지
문상객들이 눈 속으로 흩어진다
천수호 시인 / 저기는 아직 밝네요
여긴 깜깜해요 대문이 큰 3층 집과 그 마당을 반쯤 차지한 벚나무 줄기와 저층 아파트 베란다가 하나로 엮인 이 어둠을 어여 놓아요
벚나무는 아직 밝은 서산을 배경으로 잎의 어둠을 고백하고 있어요 요만한 내 어둠도 어둠이라 쳐주나요? 이런 고백
저긴 아직 밝아요 케케묵은 이야기를 뒤집어쓰고 얼얼하도록 뺨까지 한 대 맞은 그날처럼 환해서 꼭 저길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요
내 편에 서 있는 나무가 가지를 몇 개나 쑤셔 넣은 저 배경 저런 백지는 백치에 가까운 어린 날에나 필요했겠죠
이제 나는 조금 복잡해져서 창밖의 풍경에 내가 비쳐도 놀라지 않아요 내 얼굴에 초로의 할머니가 앉아 있어도 반갑기만 한 걸요
어둠이 하나로 묶은 차가운 이 돌덩어리를 내 것이라 눌러두어도 서쪽 하늘은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아요 저 밝은 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이쪽에서 먼저 불을 켜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징조는 아니에요 그 징조를 믿고 살아온 건 아니니까 언제나 왜 여기부터 어두워지는지 밝은 저쪽이 가끔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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