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일 시인 / 달빛과 누나
달빛이 좋아 처녓적 늘 울멍울멍했던 우리 누나는 풀벌레 밤새 뒤척이는 영남땅에 누워계신다.
단신으로 월남한 함경도 사내 지아비로 삼아 아들딸 낳고 대구에서 사십여 년 살다가
어느해 여름 처녓적 삼밭머리 뽕나무밭 산꿩소리 그리워서 삼베옷 명주꽃신 신고 누어서 달빛 같은 처녀 몸으로
남도땅 동리산 태안사 염불소리 들으며 영남 땅에 누워 계신다.
조태일 시인 / 다시 오월에
오월은 온몸을 던져 일으켜 세우는 달.
푸르름 속의 눈물이거나 눈물 속에 흐르는 강물까지, 벼랑 끝 모진 비바람으로 쓰러져 떨고 있는 들꽃까지,
오월은 고개를 숙여 잊혀진 것들을 노래하는 달.
햇무리, 달무리, 별무리 속의 숨결이거나 숨결 속에 사는 오월의 죽음까지, 우리들 부모 허리 굽혀 지켰던 논밭의 씨앗까지.
오월은 가슴을 풀어 너나없이 껴안는 달.
저 무등산의 푸짐한 허리까지 저 금남로까지 저 망월동의 오월의 무덤 속 고요함까지.
오월은 일으켜 세우는 달 오월은 노래하는 달 오월은 껴안는 달 광주에서 세상 끝까지 땅에서 하늘 끝까지.
조태일 시인 / 내가 아는 시인 한 사람
세상엔 벽에 걸 만한 상상의 그림이나 사진들도 흔하겠지만 내가 아는 시인의 방 벽에는 춘하추동, 흑백으로 그린 녹두장군 초상화만 덜렁 걸려 있다 세계의 난다긴다하는 예술가며 정치가며 사상가며 지 할아버지며 할머니며 지 아버지며 어머니, 병아리 같은 지 귀여운 새끼들 얼굴도 흔하겠지만
내가 아는 시인의 방 벽에는 우리나라 있어온 지 제일로 정 많은 사내 녹두장군의 당당한 얼굴만 더위도 추위도 잊은 채 덜렁 걸려 있다
손가락 펴 헤아려보니 지금부터 80년 전 농부로서 농부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에게 가장 충실해서 일어났다가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피노리에서 붙들린 몸 우리나라 관헌과 왜군들의 합작으로 이젠 서울로 끌려가는 들것 위의 녹두장군
하늘을 향해 부끄럼없이 틀어올린 상투며 오른쪽 이마엔 별명보다 큰 혹 무명저고리에 단정히 맨 옷고름 폭포처럼 몇 가닥 곧게 뻗은 수염 천리 길을 몸 묶인 채 흔들리며 매섭고 그러나 이젠 자유스런 눈빛으로 산천초목을 끌어안은 녹두장군
처음에는 아이들도 무섭다고 무섭다고 에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지만 이젠 스스럼없이 친해져서 저 사람 우리 할아부지다 저 사람 우리 할아부지다 동네 꼬마들을 불러들여 자랑을 일삼는단다
까짓것 희미한 자기 혈육 따져 무엇한다더냐 그 녹두장군을 자기네 집 조상으로 삼는단다 내가 잘 아는 시인 한 사람은
조태일 시인 / 무등산
우람히 누워 있는 저 무등을 어린 풀들이 잔뿌리 발버둥치며 하늘로 하늘로 끌어올리려 숨가쁘다.
우람한 저 무등을 새들이 가녀린 날개에 품고 하늘로 하늘로 옮기려 가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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