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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해림 시인 / 첫 키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5.

강해림 시인 / 첫 키스

 

캄캄한 동굴 속인 줄 알았는데

해안이야

비릿한 냄새가 진군해 들어오더군

군화 자국이 물새알처럼 선명하게 찍혔어

붉고, 말랑말랑한 박쥐가 날아오를 줄 알았는데

새끼 뱀들이 스멀거렸어

미친 파도의 혀가

출구를 몰라

휩쓸려 가 침몰하면서도 서로를 탐닉하는 타액들

시간의 숨소리만 앵두처럼

붉던, 그날 밤

공원은

빙글빙글 회전목마가 되어 어지러웠어

 

 


 

 

강해림 시인 / 곶자왈

​​

저 검은, 돌무더기들

 

불의 울음이 싸늘하게 식어가면서 불의 땅 폐허 위에 쓰는

불모의 문장에 이끼가 자라고, 고요의 맹아가 눈 뜨기 이전의 불립문자로 수런거렸을

 

숲은 환한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다 제 배를 가르고, 시간의 봉합을 풀고 나오느라 가시덤불로 얽히고설켜

 

낭*은 돌에 의지하고 돌은 낭에 의지하고

 

부서진 모래알이라도 씹어 삼킬 듯, 바위를 움켜쥔 나무들 뿌리는 근육질이다 기갈 들려, 허천난

 

나무 등때기마다 구렁이 기어가듯 콩짜개며 칡넝쿨이 서로 칭칭 감아 죽기 살기로 기어오르고

 

신생은, 주검이 내준 검은 젖통을 빠느라 기를 쓰며 파고들고

종결어미도 없는 문장,

 

불모는 불모끼리 격전의

 

저 치열한,

* 제주도 말로 나무를 뜻함.

 

 


 

 

강해림 시인 / 맨발

-추학서*

 

 

 외할머니는 늘 맨발이었어요 자다가도 발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 맨발로 뛰어나갔지요 한겨울에도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산에 가서 불공드리고 새벽녘에야 돌아올 때에 몸에서 촛불냄새가 났는데요 쓰러질 듯 아랫목에 누운 고단한 몸이 촛농처럼 굳어버려 다시는 못 깨어날 것만 같았어요

 

 동짓날 밤이었나, 우리 집 마당에서 굿판이 벌어졌지요 꽁꽁 언 달빛이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대낮처럼 환하게 등불이 걸렸어요 향냄새며 음식 냄새가 동네방네 귀신들을 불러 마치 잔칫집 같았는데요 둥둥 두둥둥, 깽깽 깨갱 깨갱, 북소리 꽹과리 소리에 맞춰 알록달록 화려한 옷을 입은 무당이 겅충겅충 뛰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방울을 쥔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할 때마다 방울소리가 요란했지요 근데, 갑자기 그의 눈빛이 이상했어요 어른들 뒤에 숨어 구경하던 나는 무서워 하마터면 오줌까지 지릴 뻔했지요 소지 연기가 올라가고 식칼이 던져지고…… 무어라 알 수 없는 말로 중얼대는 무당 앞에서 외할머니는 손을 싹싹 비벼 가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어요 성주신 터주신 칠성님 조왕님…… 제발 내 아들 돌아오게만 해주소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전사 통지서가 웬 말이오 천금 같은 내 새끼, 만금 같은 내 새끼…… 외할머니는 목이 메어 말도 못하고 학서야, 학서야...... 이름만 부르고 또 불렀는데요

 

*추학서: 외삼촌의 이름

 

 


 

강해림 시인

1954년 대구 출생. 한양대 국문과 수료. 1991년 계간 『민족과 문학』, 1997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구름 사원』(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환한 폐가』 『그냥 한번 불러보는』 『슬픈 연대』등이 있다. 2012년 <대구문학상>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