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시인 /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 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의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시인 / 시인
시인은 사과 한 알갱이 훔치는 것을 옳다 하질 말라 비록 그들이 가난할지라도 시인은 시기의 암울한 눈빛 그것을 어찌 당연하다 할 것인가 그들에게 여벌이 없을지라도 옳다 함은 그들을 기만하는 것 당연하다는 것도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이며 진실이 아니다 저 역사의 봉우리 봉우리 기만하고 경멸하며 백성들 울음 모아 진군한 영웅들 혁명의 황금알은 저이가 먹고 벌판으로 내어 쫓긴 백성들 시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 팔지 말고 권리 못지않게 의무 행하며 생명의 존엄 도도하게 노래하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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