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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희섭 시인 / 잠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6.

이희섭 시인 / 잠귀

 

 

귀만 달린 짐승이 서성거린다

 

밤이면 달에서 몰래 빠져나와

검은 초원을 뛰어다니는지

귓가에 발자국 소리 가득하다

 

고요의 귀퉁이에서 꿈의 안쪽까지 깃들어

울창해지는 귀

쫓기고 쫓기다 반토막난 생각들이

잠속에서 무리지어 귀를 곤두세운다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여린 짐승

뒤척임 속으로 파고드는 허기진 그림자

 

이편과 저편을 넘나들며

대낮에도 무시로 나타나 없는 꼬리 세우고 꿈을 훔친다

매일 밤 낯선 행성에서 붉은 눈 글썽이며 떠도는

 

잠귀, 밝은 짐승이 산다

 

-『문학과창작』 2022-봄(173)호

 

 


 

 

이희섭 시인 / 김포세무서

 

 

거침없이 달려드는 겨울의 속도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여자는 먼 곳으로 떠났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희고 찬 씨앗이

한 삶에 뿌리내려 죽음을 움켜쥐고 있었다

흐린 향기를 머금은 국화꽃 사이에

환한 웃음을 남기고서야 죽음은 완성되었다

 

절을 하는 내내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나뭇가지마다 바람을 묻히고 돌아서는 계절

겨울의 호명으로 불려온 눈이

오후 풍경을 지워가고 있다

눈은 어떤 수식어도 거느리지 않고

오직 명사로만 내리는데

 

새들은 어디에서 이 추위를 견디고 있을까

화장터 전광판에는 죽음에 흡수되지 못한

여자의 이름만 남아 붉게 타오르고 있다

사라지기에 아쉬움이 남는 눈처럼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열자

먼 곳으로 떠났던 눈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린 건

여자가 담아준 김치를 본 순간이었다

찬밥에 물을 말아 먹으면서

맵지도 않은 김치에 자꾸 눈물이 고인 것은

포기 사이사이마다 들어있는 붉은 이름 때문이었다

 

떠나고 나서야 기억되는 흔적들

때로 맛으로 다시 기억되는 이름은

얼마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가

겨울은 자신이 가진 눈송이를 다해

마지막까지 하나의 이름을 호명할 것이다

 

 


 

 

이희섭 시인 / 가득과 가족 사이

 

 

아내와 여행을 가다가

싸우고 돌아오는 길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어간다

 

'가득이세요?' 라는 말이

'가족이세요?' 라는 말로 들리는 순간

 

가득과 가족 사이에서 잠시 묘연해진다

 

가득이라는 것은

바닥난 속을 온전히 채우는 것이고

가족이라는 것도

서로의 빈곳을 채워주어야 하는데

 

아내는 옆자리에서 눈감고

메마른 유전을 건너가고 있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금세 빠져나가는 사소한 빈틈

서로 다른 곳을 적시고 있는 건 아닐까

가득이 가족으로 들리는 배후가 궁금해진다

 

연료가 소진되며 자동차가 굴러가듯

그동안 우리 사이에 소진된 것은 무엇인가

소모되는 것들의 힘으로

일상을 지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닥난 가족을 가득 채우러

다시 길을 떠난다

 

 


 

이희섭 시인

경기 김포 출생. 건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스타카토』 『초록방정식』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회원. 현재 중부지방국세청에 재직중. <시우주> 회장으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