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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현 시인(장흥) / 광장 집회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6.

김정현 시인(장흥) / 광장 집회

 

 

 자격을 운운하는 인간이 한바탕 고통을 노래할 때

 우리는 웃습니까 비웃습니까

 한낮의 깔깔거리는 평화 속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폭염처럼 내리쬐는 건

 하루의 축복이라고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중얼거립니다

 너와 내가 내뱉은 간단명료한 말이

 어떤 이의 심장을 시궁쥐처럼 갉아 먹는 게

 이토록 아름다운 독백이면서 방백이란 걸 알게 된 후로

 희망은 절망의 망각으로만 빛났고

 우리는 더 이상,

 기적과 운명과 영혼 따위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전염병傳染病으로 몰락의 직전인데도

 우리의 생활은 맹목적인 사랑과 분노로 나뉘어

 여태 죽임과 죽음을 무한반복 시위하고

 우리는 버려진 쓰레기들처럼 모여 타인의 심장을 슬며시 만지작대다,

 이내 무심히

 마음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증오의 복판으로 행진 또 행진하는 발자국과

 능글맞은 선동의 악다구니는

 주위의 풍경을 모조리 일그러뜨리며 다시금 앞으로만 나아갔고

 우리는 가끔씩 배가 고플 때마다

 쉰 막걸리와 식어 빠진 도시락을 실증처럼 훑어 먹으며

 거대한 광장 분수처럼

 순교 직전의 맹신들처럼 한껏 솟구쳐 오르다,

 각자의 집으로 순순히 혁명의 발길 돌리곤 했습니다

 

 


 

김정현 시인(장흥)

전남 장흥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 문예창작과 석사 수료. 2012년 15회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 2018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2018년 《시산맥》 당선되어 시문단에 등단. 저서로는 시극 『깨진 밤』과 산문집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행』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