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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형술 시인 / 말과 구름과 나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6.

김형술 시인 / 말과 구름과 나무

 

 

무슨 말로 나무를 그릴 수 있나

어떤 주문으로 나무 속에 들어갈까

 

나무는 말을 버리고

말은 나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숲가를 서성이는데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그림자도 없이

세상을 떠도는 구름들

 

구름 속에 커다란 벽들이 있네

어떤 날은 읽히고,

어떤 날은 캄캄한

 

불타는 도서관이 숨어 있네

절반은 물, 절반은 돌인

저 이상한 경전(經典)들

 

가벼워라 가벼워

 

구름 속엔

세상 모든 바람에 흔들리면서

열리지 않는 완강한 서랍들

 

아무 말 없이도

세상 모든 바람을 읽는 몸이

나무 속에 숨어 있네

 

말을 몸을 가진 나무

벽의 얼굴을 가진 구름들

 

아아! 나는 열 수 있을까

 

-시집 <무기와 악기>에서

 

 


 

 

김형술 시인 / 비단길

 

 

구름을 향해 날아간 새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구름을 뚫고 오는 날아 나오는

새들은 없다

 

구름은 새들의 무덤이었나

 

아득한 한 점으로 멀어지다

시야에서 사라진 중천의 생애들

국경을 넘어 경계를 지우고

꽃피는 숲으로 떠났으리라던 믿음은

헛것이었다

 

한 줌 망설임도 없는 서늘한 직선으로

무덤을 향해 뻗어있는 새들의 길

저 허공의 비단길

 

주검도 묘비명도 없는 무덤을 제 속에 감춘

구름은 또 무슨 마음이길래

저리 날마다 가벼운가

 

구름은 새들의 무덤이다

새들의 무덤은 구름이어야 마땅하다

허공을 제 영토로 평생을 산

어느날것이 지상에다 뼈를 묻을까

 

겨울 골목길에

새 그림자 하나 얼핏 앉았다 사라진다

 

하늘에 흩어지는 구름들 은밀히

새 발자국을 닮아있다

 

-《현대시학》 2007년 1월호

 

 


 

김형술 시인(金滎述)

1956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 199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 『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 『의자, 벌레, 달』 『나비의 침대』 『물고기가 온다』 『무기와 악기』 『타르초 타르초』. 산문집 『향수 혹은 독』 『영화, 시를 만나다』가 있음. 2010. 제22회 봉생문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