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술 시인 / 말과 구름과 나무
무슨 말로 나무를 그릴 수 있나 어떤 주문으로 나무 속에 들어갈까
나무는 말을 버리고 말은 나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숲가를 서성이는데
그림자를 머리에 이고 그림자도 없이 세상을 떠도는 구름들
구름 속에 커다란 벽들이 있네 어떤 날은 읽히고, 어떤 날은 캄캄한
불타는 도서관이 숨어 있네 절반은 물, 절반은 돌인 저 이상한 경전(經典)들
가벼워라 가벼워
구름 속엔 세상 모든 바람에 흔들리면서 열리지 않는 완강한 서랍들
아무 말 없이도 세상 모든 바람을 읽는 몸이 나무 속에 숨어 있네
말을 몸을 가진 나무 벽의 얼굴을 가진 구름들
아아! 나는 열 수 있을까
-시집 <무기와 악기>에서
김형술 시인 / 비단길
구름을 향해 날아간 새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구름을 뚫고 오는 날아 나오는 새들은 없다
구름은 새들의 무덤이었나
아득한 한 점으로 멀어지다 시야에서 사라진 중천의 생애들 국경을 넘어 경계를 지우고 꽃피는 숲으로 떠났으리라던 믿음은 헛것이었다
한 줌 망설임도 없는 서늘한 직선으로 무덤을 향해 뻗어있는 새들의 길 저 허공의 비단길
주검도 묘비명도 없는 무덤을 제 속에 감춘 구름은 또 무슨 마음이길래 저리 날마다 가벼운가
구름은 새들의 무덤이다 새들의 무덤은 구름이어야 마땅하다 허공을 제 영토로 평생을 산 어느날것이 지상에다 뼈를 묻을까
겨울 골목길에 새 그림자 하나 얼핏 앉았다 사라진다
하늘에 흩어지는 구름들 은밀히 새 발자국을 닮아있다
-《현대시학》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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