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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이엽 시인 / 나는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6.

장이엽 시인 / 나는

 

 

나는 은하수를 건너온 처녀좌의 원숭이

나는 꼬투리 속에 갇힌 콩알

나는 가로등 밑 거미줄에 걸린 나방

나는 깊은 밤에 혼자 우는 귀뚜라미

나는 뿌리 없이 꺾어 심은 마른 개나리

나는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배고픈 개미

나는 바비 인형의 벗겨진 신발 한 짝

나는 고흐의 파란 방에 놓인 귀 떨어진 컵

나는 억새풀의 반짝이는 은비늘

나는 사하라 사막에 숨어 있는 모래늪

나는 빙하 속에 정박당한 낡은 어선

나는 황태덕장에 걸려 있는 눈 뜬 명태

나는 사라진 명왕성의 먼지 입자

나는 탱탱하게 몸을 조여 울리는 소가죽

나는 투망에 잡힌 물뱀

나는 앙코르와트의 오래 된 사원

나는 악보 안의 4분 쉼표

나는 티베트 고지에서 펄럭이는 오색 깃발

나는 어항 속 수초 사이를 누비는 체리새우

나는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와 달리기를 하던 톰슨가젤

나는 개망초 얼굴 위로 예고 없이 쏟아지던 소낙비

나는 징검다리 사이의 물보라

나는 이솝 동화 세상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나는 한 발 한 발 으름넝쿨을 재며 걷는 어린 자벌레

나는 천축국을 찾아가는 근두운 탄 손오공

 

 


 

 

장이엽 시인 / 고무줄놀이

 

 

편 나누기가 늘 공정한 것은 아니므로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기둥 발목에 걸린 검정 고무줄이 무릎 위로 올라가도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고무줄을 밟고 월화수목금토일

고무줄을 뛰어넘고 월화수목금토일

칙칙 떠나갈 수 있다

 

번개같이 달려와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방해꾼만 없다면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장이엽 시인 / 씨 房

 

 

아주 작은 방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주무신다

 

 


 

 

장이엽 시인 / 지렁이의 꿈틀처럼

 

 

혼자 우는 게 어때서?

혼자 울다 코 막히면 코 풀고

혼자 울다 지치면 잠자고

혼자 울다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지

혼자 울다 울다가 오줌보 가득 눈물 고이거든

혼자서 시를 써야지

혼자서 산에 갈 테야!

혼자 울며 참았던 오줌발을 날려줘야지

 

지렁이를 봐!

귀도 없고 눈도 없이

뭉툭한 몸매로 꿈틀꿈틀

꿈의 틀을 짜는 걸

흙 한 입 삼키고 땅속에 바람길을 열고

흙 한 입 삼켰다 밀어내는 뱃심으로

단단한 지구를 흔들고 있는데

애찌러루르르 애찌르르르루

풀벌레들 카랑카랑한 목청에 화음도 넣어가며

그렇게 맑디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는데

 

 


 

장이엽 시인

196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본명: 장명주)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9년 《애지》봄호 신인문학상에 모서리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11~20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분야 세대예술인력집중육성지원(AYAF) 대상자선정,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삐뚤어질 테다』(2013, 지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