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엽 시인 / 나는
나는 은하수를 건너온 처녀좌의 원숭이 나는 꼬투리 속에 갇힌 콩알 나는 가로등 밑 거미줄에 걸린 나방 나는 깊은 밤에 혼자 우는 귀뚜라미 나는 뿌리 없이 꺾어 심은 마른 개나리 나는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배고픈 개미 나는 바비 인형의 벗겨진 신발 한 짝 나는 고흐의 파란 방에 놓인 귀 떨어진 컵 나는 억새풀의 반짝이는 은비늘 나는 사하라 사막에 숨어 있는 모래늪 나는 빙하 속에 정박당한 낡은 어선 나는 황태덕장에 걸려 있는 눈 뜬 명태 나는 사라진 명왕성의 먼지 입자 나는 탱탱하게 몸을 조여 울리는 소가죽 나는 투망에 잡힌 물뱀 나는 앙코르와트의 오래 된 사원 나는 악보 안의 4분 쉼표 나는 티베트 고지에서 펄럭이는 오색 깃발 나는 어항 속 수초 사이를 누비는 체리새우 나는 세렝게티 초원의 치타와 달리기를 하던 톰슨가젤 나는 개망초 얼굴 위로 예고 없이 쏟아지던 소낙비 나는 징검다리 사이의 물보라 나는 이솝 동화 세상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나는 한 발 한 발 으름넝쿨을 재며 걷는 어린 자벌레 나는 천축국을 찾아가는 근두운 탄 손오공
장이엽 시인 / 고무줄놀이
편 나누기가 늘 공정한 것은 아니므로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기둥 발목에 걸린 검정 고무줄이 무릎 위로 올라가도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고무줄을 밟고 월화수목금토일 고무줄을 뛰어넘고 월화수목금토일 칙칙 떠나갈 수 있다
번개같이 달려와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방해꾼만 없다면 장난감 기차는 칙칙 떠나갈 수 있다
장이엽 시인 / 씨 房
아주 작은 방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주무신다
장이엽 시인 / 지렁이의 꿈틀처럼
혼자 우는 게 어때서? 혼자 울다 코 막히면 코 풀고 혼자 울다 지치면 잠자고 혼자 울다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지 혼자 울다 울다가 오줌보 가득 눈물 고이거든 혼자서 시를 써야지 혼자서 산에 갈 테야! 혼자 울며 참았던 오줌발을 날려줘야지
지렁이를 봐! 귀도 없고 눈도 없이 뭉툭한 몸매로 꿈틀꿈틀 꿈의 틀을 짜는 걸 흙 한 입 삼키고 땅속에 바람길을 열고 흙 한 입 삼켰다 밀어내는 뱃심으로 단단한 지구를 흔들고 있는데 애찌러루르르 애찌르르르루 풀벌레들 카랑카랑한 목청에 화음도 넣어가며 그렇게 맑디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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