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겸 시인 / 공갈 공화국
출근길 현관 게시판에 부착된 안내문구가 지루하다
코로나19시대 마스크 미착용시 감염예방법 위반으로 과태료 10만 원입니다 재활용과 음식물 미 분리배출 시 재활용촉진법 위반으로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됩니다 층간 소음은 이웃 간 예절입니다 위반 시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10만 원 이하의 벌금입니다 금연구역에서의 흡연은 국민건강증진법 위반으로 1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입니다 애완동물 목줄 미착용 및 배설물을 미 수거 시 도시공원녹지법 위반으로 1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입니다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와 대로를 맘껏 달릴 즈음 긴급 출동 소방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뒷유리에 부착된 스티커 긴급차량 미 양보 시 과태료 200만 원입니다 사방 곳곳마다 교통안내판이 보이고 아스팔트 바닥에 써놓은 60㎞, 50㎞, 30㎞ 이하의 글자들 모두가 내 육신을 노리는 덫과 올가미다
조심조심 겨우 회사에 도착 또 하나의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내 카페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위반 시 1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이며 인사고과 반영이란다
칡넝쿨 사이사이로 악을 꽃이 피어나며 내 몸을 칭 칭 휘감고 있다 안간힘으로 칡넝쿨을 질근질근 씹으며 포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내 살 찢기며 붉은 살점만 뚝뚝 떨어진다. IMF 시절 폐업 점포에서 구입한 낡은 지갑 속 꼬깃꼬깃 숨겨 놓은 비상금마저 빼앗아 가는 저 악랄한 넝쿨손들
-『시사사』 2021-가을(107)호.
정겸 시인 / 나무의 노래
오래된 빨간 벽돌집에 그늘막처럼 버텨온 나무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북쪽 하늘에서 먹구름 몇 장 몰려올 때도 제 몸 흔들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오솔레미오*
고향집 다녀오던 날 야윈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서러워서 나무를 부여잡고 마구 흔들었다.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뚝뚝 떨어뜨리며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솔레미오
삶에 대한 비밀을 안고 있는 *페르마의 원리를 거의 정리하고 있을 즈음 문득 나무를 쳐다보았다 푸른빛 사라진 성긴 가지 사이로 하얀 낮달이 보였다. 나무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오솔레미오
아내가 거실의 낡은 벽지를 걷어내고 나무 문양의 벽지를 바르고 있다. 하얗게 삭정이가 생기고 가지가 꺾여나간 나무 한 그루가 경대거울에 비추어지고 있다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며 힘겹게 하늘을 받치고 서있는 나무 지쳐있다 아직도 풀칠 자국이 남아있는 일간신문 경제면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오솔레미오
*오 솔레미오: 칸초네 나폴레타나의 대표작.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태양에 비유한 곡명의 뜻 그대로 <나의 태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페르마의 원리: 피에르 드 페르마가 주장한 원리로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 또는 '최소 시간의 원리(principle of least time)'라고 한다. 빛이 두 지점 사이를 광선의 형태로 지나는 경우, 최소 시간이 걸리는 경로로 진행한다는 원리이다.
정겸 시인 / 궁평항
까치놀 따라 은빛추억은 나를 부르고 화석이 되어버린 지난 시간은 덧난 상처와 그리움을 파도에 묻었다
유빙 같은 외로움마저 수평선너머로 사라진 지금 방파제에 홀로 서 있는 궁평루는 먼 바다 바라보며 말이 없다
갈매기 울음소리에 어둠은 주춤주춤 몰려오고 도리섬 등대는 희망의 불빛 모으며 반짝거린다
어머니 닮은 순한파도 가득한 궁평항 대사리 밀물은 백사장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오고 떠났던 사랑 만선의 고깃배처럼 귀항중이다
*궁평항: 경기도 화성시 있는 낙조가 아름다운 항구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현숙 시인(까치) / 연못에 비친 그 임 외 2편 (0) | 2023.04.27 |
---|---|
하영순 시인 / 자연의 교훈 앞에 외 2편 (0) | 2023.04.26 |
장이엽 시인 / 나는 외 3편 (0) | 2023.04.26 |
이승주 시인 / 십 년 뒤에 만날 사람 외 1편 (0) | 2023.04.26 |
이위발 시인 / 필론의 돼지 외 2편 (0) | 2023.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