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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위발 시인 / 필론의 돼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6.

이위발 시인 / 필론의 돼지

 

 

필론의 돼지처럼

잠자고 있는 것을 흉내 내고 있는데

벌 한 마리 방 안에 들어와

머리 처박다 떨어졌다 다시 처박는데

열려 있는 문 보지 못하고 창호지만 두드리다

어느 사이 빠져나갔는지 모른다

의식이란 스스로 발라놓은 창호지 같아

진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하늘 높아 보일 때 사람들이 외로워 보여

높은 것을 싫어하듯

내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 곁에서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듯

돼지는 뒷걸음질 치며 악을 쓰고 있다

용서할 거리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에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위발 시인 / 오필리아

 

 

푸른색이 오로라처럼 엉겨 있고

고개 숙여 밑을 보니 푸른 물이 발가락을 물고 있었다

순간, 감이 좋았다

푸른색이 말문을 튼 채 주고받는다

“색정이 뭔지 알아?”

“생사의 마음이잖아”

파란 불빛이 터지기 시작하자

숨어 살던 이끼들이

꽃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맞닿은 다리 위엔 푸른 경계의 흔적만이

참과 거짓을 구분하듯

저 너머엔 선도 아닌 것이

저 너머엔 길도 아닌 것이

의문의 꼬리를 물고 달려들고 있었다

여우의 눈빛을 닮은 푸른 그림자가

유성처럼 떨어지자 등 위에 타고 있던

아라한이 말문을 틀려고 하는

순간, 푸름은 바다 위로 떠올랐다

 


 

 

이위발 시인 / 당나귀가 바라보는 세상

 

 

 걸어가는 당나귀가 이른 봄 흙을 뚫고 마중 나온 처녀치마꽃을 지나자, 현란한 몸 색깔로 치장한 채 구술 꿰듯 이어진 더듬이, 외계인 같은 겹눈, 옴폭옴폭 파인 점으로 멋을 부린 딱지날개를 가진 벌레를 만났다. 그 길을 왜 가느냐고, 벌레가 물었다. 이 길을 택한 것은 사람의 발자국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곤 계속해서 살을 붙여 나갔다.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한 것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뜀박질하면 나 자신만 보이고, 걷다가 서면 벌레 소리 들리고, 죽은 개구리 곁에 앉으면 작은 우주가 보이고, 당나귀 눈엔 뭐만 보인다고, 숲속엔 잎만 먹는 녀석, 즙만 빨아 먹는 녀석, 썩은 나무만 먹는 녀석, 꽃가루만 핥아 먹는 녀석, 입맛에 맞게 부위 바꿔가며 먹는 녀석, 당나귀가 한마디 던진다, “저렇게 먹는다는 것은 오늘을 볼 줄 아는 것들이고, 내일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시집 『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에서

 

 


 

이위발 시인

1959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93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어느 모노드라마의 꿈』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지난밤 내가 읽은 문장은 사람이었다』. 산문집 『된장 담그는 시인』 현재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