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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순영 시인 / 통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7.

전순영 시인 / 통

 

 

등과 배에 홍반이 여기저기 생기더니 가려워지더니 팔과 다리 할 것 없이

홍반은 대장과 소장 쓸개와 간 콩팥이 흘리는 눈물이 몸을 가르고

흙탕물처럼 쏟아졌다

 

기둥을 적시고 벽을 타고 넘어와 차오르더니 지붕을 무너뜨리고

말이 막혀버린 그는 말을 더듬고 뚫린 배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가슴에다 말뚝을 박아놓고 꼿꼿이 서서 스스로의 채찍에 피 흘리며

기우는 천년의 기둥을 붙들고, 어머니가 입에다 칼을 물었던 지난날을 어금니로

깨물어 삼키며 바다를 이루었다

 

미운 물고기도 예쁜 물고기도 없는 고래가 새우를 삼키지도 않는 물고기들은

헤엄치며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이복동생을 이인자로 세우고 쓰다듬으며 가슴에다 통을 심어 주었다

형이 흙에 묻히자 그 통을 길바닥에 깔아놓았다

 

왕과 백성이 노론과 남인이 통하고 산도 물도 구름도 들락거리는 통의 뿌리가

오백 년을 걸어왔어도 아직 광화문에 이르지 못하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전순영(全順永) 시인

전남 나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를 통해 등단. 시집 『목이 마른 나의 샘물에게』 『시간을 갉아먹는 누에』 『숨』 등과 에세이집 『너에게 물들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