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한혜영 시인 / 여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한혜영 시인 / 여자

 

 

간밤 짙은 살 냄새를

가랑가랑 끌고 와서

물을 긷는 버들 뒤로

아쉬운 듯 밤이 가네

여자여!

푸르게 출렁댔을

젊은 몸의 그 體位여

 

저 버들에 세를 들면

물 한 동이 얻을 건가

밀폐된 방 어둠 속에

잠만 자는 늙은 사랑

몸 활활

뜨겁던 밤을 잃고

적막하네 내 여자는

 

 


 

 

한혜영 시인 / 목련

 

 

방금 숨거둔 이의

가슴 여며준 듯싶은

 

손! 저

희디흰

손앞으로 이끌려가

 

이승에

더럽힌 이마 위에

종부성사를 받고 싶네

 

 


 

 

한혜영 시인 / 징검다리 건널 때면

 

 

토끼처럼 사뿐사뿐

반만 디뎌 건너봐요.

실개천 물소리는

흘러내린 풍금소리

물 젖은/ 조약돌 하나

반짝 눈을 뜹니다.

 

물빛이 흔들릴라

맘 조리며 건너가요.

말갛게 잠긴 하늘

곱게 씻긴 모래알들

생각은 여울진 물살

산빛 씻겨 갑니다.

 

송사리 떼 흩어질라

숨죽이며 건너가요.

물방개 잔등 위에

동동 실린 꽃잎 구름

한 자락 헹군 구름도

하늘 싣고 갑니다.

 

 


 

 

한혜영 시인 / 핸드폰

 

 

핸드폰 한 대씩은 새들도 갖고 있지.

지붕 위 새 한 마리 어딘가로 전화 걸면

그 소식 반갑게 받은 짝꿍 하나 날아오고.

 

핸드폰을 먼저 쓴 건 사람보다 새들이지.

전화선도 필요 없고 돈도 낼 필요 없고

저 하늘 푸른 숫자판 부리 하나면 간단한 걸.

 

삐룩삐룩 여보세요 또로로롱 사랑해요.

우리 동네 아침 시간 혼선되는 새소리들

그래도 끼리끼리는 척척 듣고 통화하네

 

 


 

한혜영 시인

1953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 1989년 《아동문학연구》 동시조 당선.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8년 《계몽아동문학상》 장편동화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과 시조집 『숲이 되고 강이 되어』 그리고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가 있음. 2006년 미주문학상 수상. 2020년 제5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경희사이버대 수석졸업. 현재 미국 플로리다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