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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꽃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최문자 시인 / 꽃밭

 

 

한 밤중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가 사라지는 법을 가르쳤지?

꽃밭의 꽃들은 다 어디 갔지?

 

꽃의 가슴에서 불쑥 튀어나오던 눈물 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생생한 혈관 몇 줄 살아있는가

 

핏줄도 살점도 파동도 바싹 마른 짐승 한 마리처럼

꽃밭이 없어진 곳

간절함이 없어진 곳

낯선 곳에 오래 서있게 되었네

 

내가 더 없어진 더 흐려진

무음 같은 곳에

 

내가 아닌 것들은

꽃이 아닌 것들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아픈 곳이 달라서

색깔이 다른 꽃들이 세상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포옹하고 있는 동안

 

내 꽃 한 송이 들어있는

거기 있던 꽃밭

 

꽃 없어지고

나 없어지고

그 밭은 어디 가 있는가

 

계간 『계간문예』 2023년 봄호 발표

 

 


 

 

최문자 시인 /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산다는 건

격렬한 것

몇 계단 내려와 두리번거렸다

 

자꾸 내려가면

나의 무엇이 남나?

잘 보이던

나뭇가지 하나 덜 보인다

 

하나님은 아직 저 아래 있다

마지막 나뭇가지처럼 무너지듯 잠들어 있다

 

사람들은 무더기무더기 계단을 오르고

나뭇가지 몇 개 더 보고 있다

나는 몇 계단 더 내려간다

 

계단 위에 발들은 구름처럼 있다가 지워진다

 

이 계단의 혀는 너무 길어

한 사람이 지워지면 다른 한 사람

너무나 개인적인 나뭇가지들

사정 없이 흔들리고

 

날 수 없으니까

 

발을 내려놓고

몇 계단 더 내려간다

 

묻혀야 한다면

땅에 닿아야 한다

나뭇가지들이 누워있는

 

계간 『시와 징후』 2023년 봄호(창간호) 발표

 

 


 

최문자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음. 박두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신석초문학상, 한국서정시문학상 등을 수상. 협성대 문창과 교수, 同 대학 총장, 배재대 석좌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