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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병호 시인 / 비의 음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최병호 시인 / 비의 음계

 

 

그녀는 키 작은 단풍나무숲 아래서 가을비를 피했다

가을이라는 발음처럼 성긴 가좌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두 줄로 길게 이어진 숲

 

그녀가 음악실에서 오르간 건반을 치듯

장조에서 단조로 옥타브를 달리하며

차례로 구르는 빗방울들

 

작은 소리에 더 크게 흔들릴 줄 알았던 것처럼

보슬비에도 그녀의 어깨는 더 좁아졌다

 

그녀의 어깨 위로 긴 생머리 위로 틱 톡

한 방울씩 건네는 실내악 같은 리듬들은

아침이라 울림이 더 커진다

 

작은 것들은 미풍에도 크게 흔들릴 줄 안다

그녀는 이번 가을의 변주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비가 내리는 동안 운동장에서 야영 준비는 시작됐다

그녀는 단풍나무 우산을 쓰고 운동장으로 건너갔다

담장 옆구리에는 가을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최병호 시인 / 습관은 발톱이 된다

 

 

대화역으로 향하는 풍림마을 오솔길이

나의 사냥터다

햇볕 잘 드는 벤치 위에 앉아있는데

지나가는 아가씨 둘이 내 사진을 찍어갔다

오늘은 낮게 뜬 태양 덕분에

며칠째 계속되던 추위가 물러갔지만

참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아 고민이다

사냥은 내가 날마다 해야 하는 숙제다

숙제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통쾌한 슬픔이다

주인의 침대맡에서 자는 친구들은 모른다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차가운 공기의 참맛과

벤치 위로 쏟아지는 조각 케이크 같은

겨울 햇빛 한 줌이 얼마나 고마운지

내가 빛바랜 벤치 위로 잠시 올라간 것은

도시의 사냥터에서 먹잇감을 찾을 때의 초조와

어쩌다 만난 참새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하는 당황을 잊기 위해서다

주인의 침대 위에서 갸르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아부하는 녀석들을

따라 하고 싶지는 않다

이 오솔길에서는 시멘트 바닥에 발톱을 늘 날카롭게 갈아놓는 버릇이 생겼다

 

이 오솔길은 나의 사냥터다

난 습관처럼 발톱의 날을 세운다

 

 


 

 

최병호 시인 / 냄비 받침에 대하여

 

 

첫눈이 왔는데 찾아갈 여자가 없어서 슬프다는

동네 시인 형님과 대화동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유명한 소설가 선생이 자주 간다는 정발산의 어느 선술집에서 처음 잔을 나누고

사람은 그저 만나면 술을 마셔야 한다는 그에게 끌려 서로 그간의 시간을 갹출했다

얼마 전 일곱 번째 시집을 낸 그에게

새로 낸 시집의 안위 따위는 묻지 않았다

술기운이 중견 시인과 동네 아우라는 인식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할 무렵

<냄비 받침으로 쓰는 시집>이라는

누가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집 제목을 정해놓고는 통쾌하게 잔을 비웠다

유난히 추운 겨울밤

대파 숭숭 썰어 넣고 날계란 고명으로 얹은

라면을 먹을 때 냄비 받침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집의 다양한 용도를 함께 기뻐했다

시집을 다 읽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시인으로 독자로 서로 의무는 다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냄비를 받칠 때 더 뜨거워질 시들을 생각했다

 

 


 

 

최병호 시인 / 믹스커피 2

 

 

후루룩 후륵

믹스커피는 공기와 함께 넘겨야 제 맛

소리가 클수록 맛있는 믹스커피

한국에서 훈민정음을 연구 중인

독일인 후베 교수는 오늘도 믹스커피를 마신다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 뱃사람들

배 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내려 마셨다는

더치커피보다 온 방 가득 잔향 고이는

에티오피아 고원의 향 예가체프보다

깊은 맛 없어도

제육 백반 점심 후엔 입에 착 달라붙는,

시험 전날 벼락공부 도우미,

새벽 3시 단잠을 뒤로하고

처자식 소소한 안식을 위해 스프링처럼 튀어나온

동작구청 별정직 공무원 미화원 김 씨의

깊은 휴식에도 믹스커피

 

허름한 작업복 틈새를 파고드는,

주문진항 바닷바람 밀어내며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그때그때 달라요 사람마다 달라요

사람들의 마을 체온만큼 부드럽고 달달한

 

 


 

 

최병호 시인 / 곰의 목에는 빨간 마후라를

― 삼수농장에서

 

 

벨라, 모스크바의 하늘에도 염소자리가

바람이 넉넉한 자리에 떠 있으면 좋겠소

이곳 삼수농장의 양들이 따스한 햇볕 아래서 풀을 뜯을 때 내는 소리는

천국의 소리 같소

양들을 거둘 때 나는 더는 시를 쓰지 않아도 돼 행복하오

펜을 버리고 풀밭에서 양 떼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새로운 시 쓰기요

눈 쌓인 농장에서 양들의 선명한 발자국을 볼 때

거기서 내 마지막 말을 발견했소

그래서 양 떼들과 함께 내달릴 때 나는 참으로 자유요

무능과 순수로 난 시인이오

이 간단한 이치조차 깨치지 못한 내 어리석음이라니

벨라, 평양에서 기린 목에 붉은 깃발을 내걸자고 노래했을 때

그들은 내게 왜 공화국에 사는 곰이나 너구리의 목에는

붉은 깃발을 걸지 않느냐고 했소*

기린이 외국 것만 좇는 부르조아적 근성의 상징이 될 줄은 몰랐소

이곳 삼수농장에서 만난 양들은 나의 새로운 스승이요

 

벨라, 나는 오늘도 꿈속에서

시 안 쓰는 자유를 꿈꾸오

나의 양들은 더 이상 사냥개에 쫓기지 않소

양 떼들이 자유로이 달리는 방향이 나의 시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보내는 첫 시가 되지 않아도 좋소

벨라

 

*김연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계간 『창작산맥』 2022년 봄호 발표

 

 


 

최병호(崔炳虎) 시인

1966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대우그룹 홍보실 10여 년간 근무. 《열린시학》 2021년 신인작품상 등단.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