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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홍섭 시인 / 등대 시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9.

이홍섭 시인 / 등대 시인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 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이홍섭 시인 /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이홍섭 시인 / 수박

 

 

찌는 여름날

노스님과 유발상좌는 웃통을 벗고

수박을 먹었습니다

넌닝구 사이로

내설악 바람이 숭숭 들어왔습니다

 

수박씨를 절 마당에 툭툭 뱉으며

유발상좌는 두고 온 한 여인의 까만 눈동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노스님은 자꾸만

흐르는 강물 쪽으로

수박씨를 톡톡 뱉는 것이었습니다

 

참매미 초록으로 울어쌓고

수박씨 지천으로 널린 여름날이었습니다.

 

 


 

이홍섭 시인

1965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문학평론가. 1990년 <현대시세계>로 시 등단,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등단.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검은 돌을 삼키다』과 산문집 『곱게 싼 인연』이 있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시인시각 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강원문화예술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