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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율 시인 / 팬더마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김지율 시인 / 팬더마임

ㅡ믿음의 형태

 서로 잘라내고 싶은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려 주세요.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무표정한 눈과 마주친다 쏟아진 주스는 컵에서 멀고 오렌지 밖을 넘지 않는다 자국은 둥글고 바닥은 자국을 힘껏 밀어낸다

 

 컵 하나를 슥슥 지운다 오렌지를 다른 컵에 담으면

 

 컵은 컵의 방식으로 오렌지는 오렌지의 방식으로 쏟아진다 탁자를 뚫고 나온 얼룩처럼 필사적으로

 

 눈을 파내자 검은 얼굴이 환해진다 컵 하나를 다시 세운다

 가만히 두면 싹이 나는 감자처럼 잘못은 매일 닦아도 흘러넘쳐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음만 먹으면 믿음은 정말 믿음으로 완성되겠지만

​​

계간 『불교문예』 2023년 봄호 발표

 

 


 

 

김지율 시인 / 올란도

 

흰 손수건 안에서

 

꿈틀거리며 왼쪽 날개가 나왔다

 

유리를 닦자

 

오른쪽 날개가 삐죽 나왔다

 

남은 날개를 밖으로 보내 주세요

 

바람이 펄럭이자

 

꿈 밖으로 흰 새가 떨어졌다

 

다시 유리를 닦자

 

모서리 아래 발자국 둘이 떨어지고

 

어둡고 긴 뼈 하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월간 『현대시』 2023년 10월호 발표

 

 


 

 

김지율 시인 / 긍지의 날을 위하여

 

사라지는 이름처럼

시간은 처음의 모습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실패에 가깝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긍지의 날은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씩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온다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오늘이 아닌데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누워있는 해골처럼

어떤 날은 긍지가 멈추고

어떤 날은 긍지만 자란다

 

긍지는 왜 두 글자에서 시작해야 했을까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 쓴 글씨처럼

호의도 적의도 없는 마음이

방안에 가득 차 있고

 

긍지 안에는 왜 긍지가 없나요

 

남은 얼굴들을

천천히 다시 쳐다보면

눈 코 입이 조용히 녹아내리는

 

오늘은 새로운 긍지의 날입니다

계간 『불교문예』 2023년 봄호 발표

 

 


 

김지율 시인

경남 진주 출생. 경상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수료(문학박사). 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내 이름은 구운몽』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 시인과의 대담집 『침묵』.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제58회 개천문학상 수상. 서울논술학원 원장. 화요문학회 회원. ‘형평문학’ 편집장.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