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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서영 시인 / 눈사람의 봄날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박서영 시인 / 눈사람의 봄날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 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 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나오고 싶은 날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청소하면서 다 치워버렸을

쓸모없이 소중하고 궁핍한 기억들 말이다

 

 


 

 

박서영 시인 / 달고기와 눈치

물속에 달이 뜬다

깊이라는 말의 안쪽에는

잿빛 몸에 노란 테를 두른

검은 반점 무늬의 달고기가 살고 있다

어쩌다가 물고기가 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영혼이 있는 동안에는 황금빛 달무리를

머리에 쓰고 떠돌아도 좋으련만

우리의 얼굴에는

눈치라는 물고기가 모여 사는 웅덩이가 있어

타인들에겐 담담한 비극이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내게 헤엄쳐 왔을 때

어디선가 들렸다, 다시 시작하라는 전언들

 

나는 사랑했고 기꺼이 죽음으로

밤물결들이 써내려갈 이야기를 남겼다

밤물결들이 은은하고 생생하게

한 사람과의 추억을 기록하고 있을 때

선원들은 내 심장을 슬쩍 들여다보다가

막대기로 휘젓기도 하였지, 그때마다

눈치가 얼마나 커져버렸는지

저기 봐, 눈치 한 마리가 걸어오고 있어!

슬픔이란 최선을 다해 증발하고

최선을 다해 사라지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달고기는 고요히 지느러미를 흔들며

눈치들을 잡아먹고 있다

이런 식욕도 있다

 

 


 

 

박서영 시인 / 흰 것들이 녹는 시간

 

 

 폭설이 쏟아지는 진안 마이산 지나왔다. 봉긋하니, 참 하얗게 솟아오른 마이산이었다. 나는 두 손을 마이산에 얌전히 올려놓고 긴 잠을 잤다. 일어나 거울을 보니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름에도 폭설이 내리는 방이 있었다. 뜨거웠다가 차가워진 귀가 있었다. 떠났는데 여전히 떠나고 있는 발소리가 들렸다.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찢어진 두 손으로 뜨거워진 두 귀를 감싸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박서영 시인 / 거북이와 새

 

 

당신 등에는 여전히 파먹을 게 많아.

사랑도 슬픔도 당신 등에 다 쏟아진 것 같아

딱딱하게 감춰두었지만

난 그것을 알기에 당신을 떠나지 않아

당신 등에 피멍이 난다면 내가 구름으로 덮어줄거야

 

 


 

박서영 시인 (1968~2018. 2. 3)

196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2006)와 『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이 있음. 제3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객원 편집위원 역임. 2018년 2월 지병으로 타계(향년 5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