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선태 시인 / 되새 떼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김선태 시인 / 되새 떼

 

​되새 떼 수십만 마리가

저녁 무렵 화폭 위에

수묵 산수를 치고 있다

자기들끼리

한 자루 붓이 되어

거대한 산을 그리고

산을 지운다 산은

동산(動山)이고

동산(動産)이다

화폭 속으로

검은 해일이 몰려온다

폭풍노도의 붓끝은

거대한 용틀임으로

허공을 구부렸다

허공으로 솟구친다

일사분란!

단 한 획도 삐져나가거나

막힘이 없다

단 한 순간도 한눈팔거나

주저함이 없다

일필휘지!

되새 떼 수십만 마리가

수묵 산수 위에 초서로

시를 휘갈기고 있다

​​

월간 『현대시』 2021년 2월호 발표

 


 

 

김선태 시인 / 내 속에 파란만장

 

내 속에 파란만장의 바다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썰물이 지네

썰물이 지면 바다는 마음 밖으로 달아나

질펀한 폐허의 뻘밭 적나라하네 상처가

게들처럼 분주히 그 위를 기어다니네

발자국들 낙인처럼 무수하네 가만 보니

여(礖) 같은 사랑 하나도 박혀 있네

소낙비라도 오면 뻘밭이 제 검은 살점을

잘게 뜯어내며 오열하는 것을 보네

밀물은 만(灣)처럼 깊숙이 파인 가슴속을

철벅이며 오네 잘 삭은 위로처럼

부드럽게 뻘밭을 이불 덮네

그러나 내 속에 밤이 깊을 대로 깊어서

만조가 목까지 차올라 울렁거릴 때

별안간 무서운 해일이 일어

마음의 해안선 전체가 넘치도록 아프네

내 속에 파란만장 바다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물이 드네

계간 『열린시학』 2019년 봄호 발표

 

 


 

 

김선태 시인 / 무화과꽃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 말을 끝내 밖으로 꺼내 보이지 못하고

안으로 깊숙이 감춘 채 이우는 너는

얼마나 서럽고 답답한 꽃이냐

 

밖으로 꽃을 내밀고 싶어도

스스로 욕망의 싹을 잘라버린 조선 여인네처럼

터져 나오는 피울음을 안으로 눌러 죽이며

혼자서 속울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유년의 다락방에 갇혀

연필에 침을 묻혀 고백의 편지를 써놓고도

끝내 부치지 못한 어느 외골수 소년처럼

혼자서 벙어리냉가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를 먹다 보면

까만 젖꼭지처럼 말라비틀어진 무화과 속에

빼곡히 쌓인 무수한 울음의 알갱이들이

톡톡 터져 나오는 것이다

계간 『시에』 2020년 여름호 발표

 

 


 

 

김선태 시인 / 고속열차를 놓치다

목포에서 ktx고속열차를 타고 서울 가다

옛날처럼 대전에서 잠시 내려 담배를 피운 사이

열차는 그만 떠나버리고 나는

낙오된 섬처럼 혼자 남았다

 

한참을 열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서울행을 중도에서 앗싸리 작파해버리고

반대쪽에서 무궁화호 완행열차를 타고 싸목싸목

다시 목포로 돌아와 버렸다

 

과거로 되돌아간 듯 마음이

묘하게 편하고 홀가분했다

 

앗싸리 : ‘아예’의 전남 방언.

싸목싸목 : ‘천천히’ 혹은 ‘느릿느릿’의 뜻을 지닌 전남 방언.

​​

계간 『시인수첩』 2022년 겨울호 발표

 

 


 

 

김선태 시인 / 꽃들의 전쟁

꽃들의 전쟁이 터졌다

 

목표는 섬진강변에 온통 꽃불을 놓고 올라가

지리산 천왕봉에 봄의 깃발을 꼽는 일

 

구례 산동의 산수유 소대가 먼저 노란 연막탄을 쏘아 올리자

광양 다압에 집결한 매화 군단의 사격이 일제히 시작됐다

 

자욱한 포연을 뚫고 화개로 진격해 들어가자 이번엔

쌍계사 벚꽃 연대가 하얗게 질려 그만 혼비백산한다

 

지리산 곳곳에서 펑펑 터지는 산벚꽃 포대의 파상공세

 

이제 세석평전이 붉은 피로 덥힐 때까지

철쭉 군단과의 마지막 일전만 남았다

 

고지가 눈앞이다

월간 『현대시』 2021년 2월호 발표

 

 


 

 

김선태 시인 / 밥그릇과 무덤

밥그릇과 무덤은 닮았다

밥그릇을 엎으면 무덤이 되고

무덤을 뒤집으면 밥그릇이 된다

 

엎었다 뒤집는 일 반복하는

우리네 생사의 리듬

 

밥그릇과 무덤을 합하면 원이다

둥글게 돌아간다

 

계간 『시현실』 2021년 봄호 발표

 

 


 

 

김선태 시인 / 배롱나무 낚시

만개한 배롱나무꽃 가지가

낭창낭창한 팔을 뻗어

잔잔한 연못에 낚시를 드리운다

 

붉은 꽃잎이 밑밥처럼 떨어지자

물고기들이 그걸 받아먹으려고

다투어 튀어 오르며 야단법석이다

 

지루한 여름 한낮이

배롱나무 낚시 끝에 걸려

파들파들하다

무크 『시에티카』 2021년 하반기호 발표

 

 


 

 

김선태 시인 / 만월·1​

 

 

밤하늘이 캄캄한 우주의 자궁에서 눈부신 알을 꺼내놓으면

그 알을 깨고 나온 빛의 자식들이 천 개의 강에서 뛰어논다

계간 『시작』 2022년 봄호 발표

 

 


 

 

김선태 시인 / 빈 의자

​​

복사꽃 핀 언덕에 의자가 두 개

한쪽에 내가 다른 한쪽엔 그녀가 나란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만 꿈결 같은 봄날이 흐르고

그녀는 향기만 남겨놓은 채 홀연 먼 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향기는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으므로

향기와 내가 나란히 앉아 오래도록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강물이 흐느끼는 소리로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빈 의자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앉아 있습니다

계간 『발견』 2022년 겨울호 발표​

 


 

 

김선태 시인 / 적중

지금껏 그의 화살은 세상의 한복판에 꽂히지 못했다

늘 조금씩 한쪽으로 치우쳤다

 

화살은 꼬리가 긴 물고기와 같아서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과녁을 향해 헤엄쳐간다

 

과녁으로 가는 길은 좌충우돌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가 다시 활을 당긴다

이번에야말로 만파식적의 평정심이 필요하다

 

팽팽한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으며 바르르 떤다

마침내 적중이다

 

와, 모두의 환호성이 터진다

 

좌도 우도 위도 아래도 아닌 중심은 중도이고 정도이다

고요한 무풍지대 태풍의 눈이다

계간 『애지』 2021년 겨울호 발표

 

 


 

김선태 시인

1960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과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1996년 《현대문학》에 평론 〈비애와 무상의 시학〉을 발표하며 평론가로도 활동. 저서로는 시집으로 『간이역』 『동백숲에 길을 묻다』 『살구꽃이 돌아왔다』 『그늘의 깊이』 『한 사람이 다녀갔다』 『햇살 택배』와 평론집 『진정성의 시학』 『풍경과 성찰의 언어』 등과 문화기행서 『강진문화답사기』가 있음. 애지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수상. 현재 목포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