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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창환 시인 / 낙타의 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9.

고창환 시인 / 낙타의 길

 

 

거기에선 아주 느리게 걷자

모래 바람 비껴갈 때 꿈벅거리는 눈

감았다 뜨면 보이리

사는 것이 이렇게 흠집투성이구나

 

먼 하늘 별들이 돋으면

오래 멈춰 서서 생각 깊게 바라보자

 

너덜거리는 시간이

긴 그림자를 끌며 지나도

가뭇없이 멀어지는 것들을 꿈꾸지 말자

 

사는 것이 모래 벌판에

길을 다지는 일이지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의 굴절이었구나

 

함부로 흘러나간 삶을

거짓처럼 사라진

물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거기에선 아주 느리게 걷자

마른 나무 그늘 목을 축일 때면

짓물러진 발자국이라도 가만히 짚어보자

 

 


 

 

고창환 시인 / 오월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꾸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고창환 시인 / 발자국들

 

 

수백만 년 전 화석에 찍혀 있다는

두 쌍의 발자국

화산재 채 굳지 않은 그 길을

그들은 어디로 걸어가고 있었을까

그 후로 얼마나 많은 발자국들이

낯선 길을 따라 떠돌았을까

 

 


 

 

고창환 시인 / 길

 

 

이끼 낀 수초 사이

몇 마리 수마트라가 빠져나온다

수없이 되밟아 걸었을 길

이끼는 유리벅에도 달라붙어 있다

둥른 기포가 올라온다

수면 위엔 한 점의 구름도 없다

발자국 위에 찍힌 발자국이

부글거린다 썩어가는 내부의 길이다

자신의 똥과 살비듬들이 더럽혀놓은 생

그것을 어쩌지 못해

온몸으로 고리를 젖는 길

 

숨쉬는 일도 길을 걷는 것이다

 

 


 

 

고창환 시인 / 내 동료 K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시인

1960년 서울 출생. 인천대 국문과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인천효성중학교 등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교사 시인. 시집으로 《발자국들이 남긴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