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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백겸 시인 / 불타지 않는 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9.

김백겸 시인 / 불타지 않는 배

ㅡ피라미드 몽상

 

 

 하늘의 문을 열어 시리우스 은하의 영원으로 가기 위한 차원이동장치-기자(gija)의 피라미드

 태양의 아들 파라오들은 공간에 돌을 쌓아 시간을 가두어 두고자 했다지 얼음을 저장한 석빙고처럼 죽은 자의 일생을 방부 처리해 부활의 때에 시간을 톱으로 썰어 사용하고자 했다지

 고대 이집트인들이 불타지 않는 배-피라미드에 몸을 실어 먼 시간의 대양을 건너가고자 했던 불사 환상이 참혹하구나

 

 얼어붙은 시간이 녹아 왕들의 미이라에 피가 돌고 살이 채워지면 하늘의 문이 열리며 생명이 시작한-최초의 하늘로 돌아가는 마법

 환상에 중독된 늙은 학인의 호기심이 고대 인도의 소마주를 먹고 가시광선과 가청주파수에 갇혀 있는 감각의 감옥을 열어 보고 싶구나

 모세 지팡이가 가른 홍해 바닷길처럼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온 야곱의 꿈을 걸어가보고 싶구나

 

 이 모든 제의의 원천을 무게 중심의 석실에 감추고 사막의 먼지와 바람과 현재의 침묵 속에 서있는 기자(gija)의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늙은 학인의 환상을 자석처럼 끌어당겨 영원으로 가는 입구-클라인(klein)공간의 상징처럼 누워있네

 피라미드는 폴리버스(polybus)와 웜홀(worm hole)로 가는 태양의 배-라Ra의 비밀을 피라미드 기하학 속에 품고 있네

 

 태양의 배가 출발하는 시간은 지평선에 뜨는 태양을 노려보고 있는 스핑크스만이 알고있겠구나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이상한 키메라(chimera)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 별들의 시간을 이빨로 물어뜯을 때

 시리우스 은하가 파견한 UFO가 선지자 에스겔이 본 불꽃 눈들의 짐승처럼 착륙해서 하늘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는 몽상

 카발라(Kabbalah)의 비밀 제의가 지상과 하늘이 하나인 에덴의 생명나무-히에로파니(hierophany)를 현시하는 몽상

 

계간 『딩아돌하』 2023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장님 시인 호머의 제자

 

 

 늙은 학인이 EBS의‘걸어서 세계 속으로’- 미얀마 울울창창 대나무 숲과 황금 불탑을 보다가 늙은 학인이 새벽에 잠 깨니 밤은 차갑고 온수 침상은 뜨겁다

 늙은 학인이 멍하니 창 밖을 보니 백만 송이 장미가 피어있는 새벽 구름의 노을

 늙은 학인이 멍하니 창밖을 보니 아파트 정원 메타세콰이어를 꽃뱀처럼 넘어가고 있는 찬바람 한 줄기

 아직 뜨지 않은 태양은 밤의 무게 때문에 괴로웠던 희망의 은유였던가

 어둠 속에 있는 서가의 책들은 중환자실의 코마(coma)환자였는데 늙은 학인이 스스로를 보니 뇌세포가 말라가고 있는 슬픈 남자

 

 늙은 학인은 죽음의 지혜로 인생의 고통과 쾌락을 칵테일한 몽상의 숙취에서 깨어나는 시험을 남겨둔 졸업반 학년

 백년 뒤에나 기대했던 늙은 학인의 시집이 만권 쯤 팔려 인세로 고급보드카에 캐비 알 안주로 혼 술을 먹는 몽상

 초월과 현재 사이에 국경이 있고 그 국경이 인간이 사는 상식의 왕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독주의 취기가 결정한다는 생각

 늙은 학인은 금강경 구절-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을 암송하며 심장의 부정맥과 함께 여생을 견디고 있는 신세

 

 늙은 학인이 세수를 하고 현인들의 좌망(坐忘)을 본받아 정좌했으나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심사는 다시 헝클어진다

 황 도(黃道)의 검은 별들이 폭풍 같은 리듬을 쏟아내 사계가 흘러갔는데

 초로 인생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걸어갔던 순간은 단 한번 뿐

 초로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과 죽는 순간이 하나인 시공간의 앙코르와트 궁전에서 마하바라타의 전사처럼 창을 잡고 전차를 몰아 달려갔던 순간은 단 한번 뿐

 

 늙은 학인은 강철 칼로 괴물을 쓰러뜨리는 테세우스가 아니기에 마법의 기호를 다루는 장님 시인-호머의 제자가 되었지

 늙은 학인이 수도원의 필사실에 앉아 양피지에 비전의 지식을 옮기는 시의 수도승이 되었으니 배고픈 운명이라는 생각

 늙은 학인은 시 천편으로 남가일몽을 견디었던 초라한 예언자 일뿐

 늙은 학인이 요양병원 대신 노르웨이 노인들처럼 삼나무 숲속의 오두막 침상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는 몽상

 늙은 학인이 이승의 마지막 사치-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소리가 펼쳐진 대악(大樂) 속에서 죽어가는 몽상

계간 『시와 사상』 2023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오동나무에 핀 아기열매들

 

 

 괴물이 된 집이 늙은 학인을 다시 초대해서 대흥동 도지시관사 뒷골목으로 불려갔던 꿈의 기억

 옛집의 울타리가 가문비나무처럼 올라가더니 뜰은 거대 정원으로 변하고 집은 저택이 되었던 꿈의 기억

 오동나무도 하늘을 찌르는 생명나무-괴물로 변했는데 아기 열매들이 매달려 있었던 꿈의 기억

 바람이 흘러드는 오동나무 그늘에서 아기들이 인삼과(人蔘果)처럼 흔들렸는데 그 무시간의 풍요 속에서 늙은 학인이 행복했던 꿈의 기억

 

 손오공이 서왕모의 반도원에서 훔친 천도 복숭아가 인삼처럼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듯이 불로장생의 알레고리는 사람의 육체나 영혼을 먹는 행위였던가

 원시 문명의 식인종들은 가족과 친지의 영혼을 몸에 간직하기 위해 죽은 몸을 먹었다는 인류학자들의 해설이 있었지

 예수는 포도주와 빵을 자신의 피와 살이라 은유 하면서 12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였다는 상징스토리

 카톨릭 신자들은 아직도 영성체 의식에서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미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말이지

 

 이 꿈이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이었음을 몇 년 후에 확인 했었던 현실의 기억 신화의 이미지들을 모은 도판에서 당시의 꿈과 똑 같은 그림을 보고 충격에 빠졌었던 현실의 기억

 도판에는 ‘인간의 열매를 맺고 있는 왁왁나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현실의 기억 방초가 핀 에덴 동산에는 날개를 단 천사와 날아다니는 큰 새의 이미지들이 있고 큰 나무에 인간들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던 현실의 기억

 그림이 173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려졌으며 서인도의 터키역사로부터 유래했다는 해설을 읽었던 현실의 기억

 

 생각해보니 늙은 학인이 생명나무가 백일몽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했던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구나

 늙은 학인이 그 때 그 순간 백일몽에서 손을 뻗어 아기 열매를 와싹 깨물어 먹었더라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는 은혜가 도래하였을 것을

 늙은 학인이 삼천년에 꽃이 피고 삼천년에 열매를 맺고 삼천년에 익는다는 불사의 인삼과(人蔘果)를 어두운 꿈속에서 보았구나

 늙은 학인의 무의식이 생명나무-괴물의 사랑으로 충만해 지는 인연은 또 몇 겁의 캄캄한 시간이 흘러가야 만날지

 어둡고 깊은 은하수들이 뜬 밤하늘-영겁의 푸른 바다 속으로 흘러가 버린 꿈만이 알겠구나

 

* 에피파니(epiphany): 그리스어로 진리의 현현(顯現)이나 사물이나 본질에 대한 직관을 뜻함.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으로 아기예수를 찾은 것을 기리는 축일의 의미로도 사용.

 

계간 『모던포엠』 2023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등과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 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主幹 역임. 현재 〈시힘〉, 〈화요문학〉동인.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