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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길나 시인 / 분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9.

김길나 시인 / 분실

 

 

집에서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처음에 목걸이가 사라지고

그 다음엔 안경이 없어지더니

얼마 전에는 바지가 도망가 버렸다

가출이 아님에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른손과 왼손이 멀다

한 손은 감추고 한 손은 찾는다

 

나는 나를 감추고 물건을 감추고 중요한 약속을 감춘다

바지가 나를 감추고 있었으나 감춘 것이 드러나자

바지가 없어졌다. 나는 노출을 감추기 위해 나를 가둔다

 

평행하는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서로 멀다

한 눈은 찾고 한 눈은 기억을 잠근다

점점 멀어져가는 두 귀집 사이에 안경다리가 걸리지 않는다

하릴없는 안경이 잠적해버렸다

분실물에서 오는 메시지가 귀집으로는 들어오지 않으므로

찾는 일이 더 난감해진다

 

분실물 찾는 일이 일상이 된 나는 막상 분실물을 만나면

헛보고 그냥 지나친다. 그렇게 헛보며

어린이가 지나가고 젊은이가 지나가고 지천명이 지나갔다

지나간 나는 나를 찾지 않는다

다가오는 나는 내일의 모습을 열어 보이지 않고

오늘의 미아인 나는 나에게 들키지 않는다

 

고리로 변신한 목걸이는

혹여 목 잃은 달이 두르고 있으려나

오늘밤 달무리 지고 내일은 비가 올라나

 

<시와 경계> 2009년 봄호

 

 


 

 

김길나 시인 / 눈

 

 

수리부엉이 한 마리

캄캄한 벼랑 위에 앉아 있다

어둠이 뜯어진 자국, 거기

뚫린 구멍, 거기

동그랗게 수리부엉이의

두 눈이 박혀 있다

동그랗게 두 눈 속

꽃이 박혀 있다

 

깍아지른 벼랑에서

일순,

빛을 낚아챈

그것

 

 


 

 

김길나 시인 / 0時에서 0時 사이ㅡ겨울 정류장에는

 

 

영하의 겨울이다. 사람들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어디론가 거듭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길에 서서 망연히 길을 응시한다.

응시하는 두 눈 밑으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게 있다.

말할 때마다 언어에 서려 퍼져 흐르는 게 있다

사람 안에서 스며나와 김발로 증발하는 저것,

하얀 숨결, 혹은 하얀 입김

살이 허물어 氣化하는 그 마지막 구름깃발이

코에, 입에 미리 꽂혀 펄펄 날리다

사라지곤 하는,

그러나 저 숨결에 배어나오는 김발은 또

살아 있는 그대 몸속에서 가만가만 출렁이는

따순 기운 한 자락이거나

불안과 고독까지도 모락모락 묻어나오는

그대 눈물의 승천일 터인데

그대 날숨이 내 들숨으로 스며 들어오는

우리 서로 숨을 섞고 사는 지상의 겨울 길에서

여린 입김들 하얗게 김발로 스러지며 남기는 말,

그 말 채 엿듣기도 전에 내 곁에 사람들 어느새

떠나가고 없다. 이제, 그 겨울 정류장엔

나도 없다

 

 


 

김길나 시인(1940-2022)

1940년 전남 순천시 출생. 본명: 김명희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등단하고 1996년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 』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 『시간의 천국』과 산문집 『잃어버린 꽃병』이 있음.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가톨릭교회 선교사로 활동. 부정맥 증상으로 투병중 별세. (향년 9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