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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영헌 시인 / 송곳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9.

주영헌 시인 / 송곳

 

 

빈 몸에 취기로 둥지를 튼 새벽

몸 안이 절절 끓고 있다

거미처럼 천장으로 기어 올라간 그림자가 투명한 집을 짓는

새벽이 터져 환한 아침

순서를 앞지른 아이가 내 옆에서 거꾸로 자고 있다

추위를 쫓고 덮어준 이불 사이로 손가락이 뾰족하다

검게 때가 낀 손톱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겪어 나가는 모든 일은 다 깰 때가 있다

어느 지점을 봉합한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일

잠시 시들었던 아이의 몸에선

시든 꽃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말들이 의사의 입에서 옮겨지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놀다 온 두 손

억세게 철봉을 잡았던 손가락도 기진한 듯

아비의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잡지 못하고 있다

병실이 놀이터라도 되는 듯

손톱 사이엔 놀이의 흔적이 얼룩져 있다

수액이 줄어드는 시간

그만큼 비워진 아이의 시간이 몸속에 차오르고 있다

 

분주함이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있는 병실

침묵은 분주함의 후생 중 하나일 것,

 

눈을 떴으나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난밤 가시지 않은 취기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쿡쿡 찌르고 있다

이제 아이는 지나온 빈 시간을 구겨 논다

 

정지된 것들을 터트리는 송곳이 반짝 빛났다​

 

 


 

 

주영헌 시인 / 힘은 어디에서 오나요

 

뒤돌아서는 당신의 그림자는 왜 짙은 그늘로만 기울어지나요

안 그래도 휘어진 등 힘들어 보여서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힘은 어디서 오나요

벽에 못 하나 박는 일이나

시장바구니에 저녁거리를 담는 일

사무실에 홀로 남아 야근하는 일이나

과장님의 주말 카톡까지도

생각해보면, 모두

심(心)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울컥하는 또 다른 마음도 있습니다

말로는 내 마음 다 담아낼 수 없어

당신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습니다

심(心)내요

힘내요

 

 


 

 

주영헌 시인 / 대한민국人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원주민이라는 주민등록증도 있습니다.

 봄철이면 중국발 황사를 다 함께 호흡합니다. 우리는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월드컵에는 붉은 옷을 입고 함께 큰 함성을 질렀습니다. 올림픽에는 ‘영미!’라고 같이 외쳤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국말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안녕’이라는 말까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니까’라는 말도 이해하겠습니다. 주어와 동사와 단어, 그 낱낱의 의미는 이해하겠는데,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목청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보니 감정의 격함은 알겠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자, 목소리를 낮추고, 우리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이 말은 이해하시죠.

 당신 말을 한국어 ‘가’라고 부르고 내 말을 한국어 ‘나’라고 부릅시다. 누군가 우리 사이에 낀다면 한국어 ‘다’라 부릅시다.

 우리,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주영헌 시인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 석사. 2009년 《시인동네》 신인상(시) 당선, 2019년 《불교문예》 신인상(평론) 당선. 시집으로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시인동네, 2016),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