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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외자 시인 / 숨겨둔 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0.

천외자 시인 / 숨겨둔 집

 

 

꼭 돌아와야 하는 소풍은 아니다

가서 늦어져 이쪽에 불이 켜질 때

아무 생각 말고 그 등불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잠들어버리는

그런 소풍*

 

갈 곳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집

경북 안동시 길안면 산하리 붉은 패랭이꽃이 핀 강변

강둑을 따라 어린 아카시아 관목의 잔가지와 잔 돌을 깔아서 만든 집이 있다

당분간은 도요새와 강바람과 물안개에게 맡겨 둔 집

거기서는 내 키가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이 보이지 않고

내 발가락이 보이지 않고

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고

내 추위와 슬픔마저 보이지 않던 크고 따뜻하고 깊숙한 집

아침마다 그곳으로 간다

작고 초라한 이삿짐

슬픔 한 줌과 햇살 한 홉을 태워

내 집 처마에도 불을 켜고 싶다

어쩌면 거기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상의 많고 많은 집들에게는,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까

 

지상의 불빛이 천국보다 더 먼 때가 있다

 

* 이형기 시인의 「소풍」 부분

 

 


 

 

천외자 시인 / 새 주소

 

 

나는 1938년생, 길안국민학교 1학년 1반 이윤순

해방이 되자

학교에서는 부형들에게 국문해독을 시킨다고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다

 

순아, 순아,

이리 와서 네 어머니가 쓴 받아쓰기 노트 좀 읽어보라

“간토긴산” (원문은 강원도 금강산)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푸르오 내 둔덕이 푸르오” (원문은 실종됨)

 

받아쓰기 공책에 제 멋대로 쓰는 부형들,

틀린 것은 없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십 여년

아다마*가 된 어머니의 육체는 이제야

온갖 것들과 편안하게 내왕하는 잔디가 되어 세세연년 푸름으로 깊어간다

 

사람들이 죽은 자의 주소를 물으면

나는 어머니의 받아쓰기 공책을 내민다,

 

간토긴산, 시냇가에 버드나무가 푸르오, 내 둔덕이 푸르오,

 

그리운 내 딸 순아,

이 어미는 원래 푸른색이 아니었어, 푸른색이 꿈이었던 적도 없어

다만, 내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믿었었지

 

* 흙

 

 


 

 

천외자 시인 / 달맞이꽃

 

 

지금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호젓한 산 길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귀

별과 초승달을 바라보는

가늘고 긴 목

 

내 목숨에, 내 죽음에 무엇이 부족하지

푸른 빛도 붉은 빛도 사양

 

나는 노랑만을 가진다

 

 


 

천외자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 현재 소래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