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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애 시인 / 만국기
곳곳에서 날아온 철새들 비상 중이다
저들에겐 국경이 없어 여권도 비자도 없이 서식지 언저리에 날아든다
수만 마리가 넘나들어도 불법체류라고 귀향 조치를 내리지 않는다
비바람에 날개가 꺾일까 노심초사할 뿐 소음과 흩뿌려진 배설물도 감수한다
조망을 보고 찾아온 것도 아닌데 깃발이 머물면 풍경이 된다
바람은 냉기를 전해오고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하는 새들 팽팽한 활주로를 만들어 비행 중이다
머물 곳을 찾아 가는 곳은 다르지만 새들에겐
하늘은 하나다 추운 곳과 따듯한 곳이 있을 뿐이다
신영애 시인 / 고난에는 움이 튼다
돌부리에 걸려 울던 일은 고난이 아니다
고열에 생사를 넘나들며 산수유를 다려먹던 일 담 넘어 벌레 먹은 장미를 훔치다 겪은 이별도 고난이라고 하지 않는다
파뿌리의 언약이 효능을 발휘할 때쯤 기가 스러지고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어야 할 때 어스름한 노을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때에 한 사람을 하늘로 보내야 하는 건 고난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나른해진 목소리로 오늘은 뭘 먹지 우리 뭐할까 이런 일상을 이야기할 수 없는 건 고난이다 둘이 보았던 들꽃을 혼자 바라보는 건 고난이다
소소한 일상을 혼자 하는 건 고난이다 고난에서 자란 싹은 사소한 것들을 아파하지 않는다
-시집 『나비가 전하는 말』 2017. 문학의전당
신영애 시인 / 건강검진
수사는 지하벙커에서 시작되었다 주어진 암호는 107호 가문의 내력까지 추적하며 비밀문서는 자필 서명되고 LTE로 연결된 수사망은 빠져나올 수 없다 미소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눈빛은 모두가 명수사관임을 암시한다
그림자처럼 남겨진 그대 영상 하나 숨겼을 뿐인데…
심증은 소문보다 못해 증거가 될 수 없다 물증을 찾기 위해 최첨단 기계로 몸을 훑어가고 삼킨 것부터 배설물까지 뒤지며 토설치 않는 말을 찾기 위해 약물을 주입시킨다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파리한 얼굴로 끌려 다닌 힘겨운 시간 부릅뜨고 버티던 눈꺼풀이 문을 닫는다
끝내 너를 새겨놓은 흔적, 찾아내지 못했다 오진이다
신영애 시인 / 그리고 구름은 사라졌다
바람이 부고를 전했다
중부 하늘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먹구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물로 빚어진 그의 몸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사라진다 조문을 위해 잰걸음으로 모여드는 구름들 번개가 조등을 켜고 우레가 외는 상두소리 요란한 장례식을 치르는걸 보니 명사의 죽음인 듯
리기산의 운해로 머물고 싶었으리 메마른 나무에게 여우비로 적셔주고 싶었으리
장례는 풍장으로 치러진다 너나없이 상복을 입고 곡비처럼 찔끔거리며 휘날리는 만장의 뒤를 따르고 있다
땅에서는 망자 굿이라도 하는 듯 타닥타다닥 흙 향이 진동한다
신영애 시인 / 비문증
한때는 꽃이었음을 감지한다
이른 봄 장다리꽃 위에 포르르 앉고 싶었을 나비 한 마리 수없이 날개를 폈다 접는다
가시거리는 눈과 눈 사이
왼쪽 눈이 오른쪽에게 오른쪽 눈이 왼쪽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눈 질끈 감고 덮어버렸던 그날
조금은 가물거리는 너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하느작거리며 무언가 새기고 있지만 스텝은 엇박자여서 얽히지 않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나비가 전하는 말
-시집 <나비가 전하는 말>에서
신영애 시인 / 산수유 그녀
바짝 마른 산수유 열매 아프게 매달려 있다 나뭇가지에서 혹한을 견딜 때 탱글거리던 기억을 지워야 하는 봄이 오고 있었다
꽃망울 터뜨린 이른 봄날 아련한 꽃송이 뒤에 민망한 듯 숨어 있다
일찍 남편을 여읜 그녀 붉은 열매가 이빨을 물들일 때 구부정한 등으로 학비는 송금되었고 아들은 산수유나무보다 크게 자랐다
요양병원 침대에서 검붉은 산수유처럼 말라가고 있는 그녀
몽글거리는 아이의 배설물까지도 꽃송이처럼 바라보던 얼굴은 앙상하게 굳어 있다 손은 침대 모서리에 묶인 채 미음 줄로 연명하는 것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산수유 열매가 들어 있는 그녀의 눈
말라비틀어진 곳엔 수액 한 방울 올라가지 못한다
산수유 꽃은 언제나 서럽게 핀다
-시집 『나비가 전하는 말』 2017.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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