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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명 시인(안동) / 근황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3.

이명 시인(안동) / 근황

 

 

장마철 오락가락하던 먹구름 둘둘 말아 빨랫줄에 널었다

 

빨랫줄을 받치고 있던 서어나무 기둥이 기울고 빨랫줄이 축 처졌다

 

당신의 잠자리가 축축할까 봐 고르게 펴서 널었다

 

오전 나절 무더위에 먹구름이 뽀얗게 말라갔다

 

뽀송뽀송해진 구름

 

후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가볍게 날아올랐다

 

푸른 하늘 아득히 깔린 솜털구름

 

이제 당신에게 나의 하루를 보낸다

 

 


 

 

이명 시인(안동) / 털오리나무 사랑

 

 

사람도 털털한 사람이 좋듯이

나는 털오리나무가 좋았다

 

나름대로 밑동 아래 옹달샘 하나 두고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보며 매무새를 다듬는

 

어설프지도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비탈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제멋대로 자란 가지들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엉거주춤 어깨춤을 추는

 

생각하면 할수록 내 속이 환히 밝아오는

미소 짓는 듯한 그 나무가 좋았다

 

고택의 정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에 쉽게 띄지도 않고 뭇 사람들 그냥 지나쳐버리는

 

그러나

가슴 속 어딘가 목록을 정해 둔 듯

내가 곁을 지날 때마다 가지를 흔들며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요요한 자태

 

푸른 눈빛이 너무나 좋았다

 

 


 

 

이명 시인(안동) / 절정

 

 

울지 마라, 새야

그물에 걸린 새를 보며 울지 마라, 새야

저 봉긋한 것들이 모두 무덤이란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그때 울어라, 새야

바다에는 창문이 없단다

그래서 하염없이 부푸는 거란다

 

비가 내리고

내리는 비는 물이 되고

물속에 잠겨서 더욱 깊은 물이 되나니

 

육중한 것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넘어야할 것이 한계령뿐이겠느냐

 

울어라, 새야,

소리 내어 크게 울어라, 새야

내 속에 바다 하나 생길 때까지 실컷,

울어나 다오

 

 


 

 

이명 시인(안동) / 텃골에 와서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

 

불을 품고

바람벽에 기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나무들은 또 얼마나 선한가

 

버려져 있는 나무보다 선택되었다는 마음에 안도하듯

틈새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장작은 서까래까지 닿아 있고

영혼들은 자유로운데

언제부터 나무들은 제 몸을 태울 생각을 했을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속에 남아 있는 한 톨의 습기마저 돌려드리며

세월을 둥글게 말아가고 있다

 

나는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

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 있다

 

사람들은 왜 거기까지 갔느냐고 말을 하지만

뜨거운 것이 사랑이라면

부풀어 오르는 것은 그리움이라 해야 하나

 

처마 아래 장작 곁에서

고요히 부풀고 있는 한 독의 술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발화를 기다린다

 

 


 

 

이명 시인(안동) / 화엄

 

 

밥 다 퍼낸 가마솥

덮어둔 뚜껑을 열자 열기가 확 올라왔다

구수한 냄새도 함께 올라왔다

노릇노릇 바닥 가득 깔려 있던 누룽지, 가장자리가 둥글게 일어났다

중심을 잡고 몸을 말아 일어나는 저, 단단함

활짝 피어난 꽃

불편한 몸을 힘주어 일으키던 어머니의 아랫목이 보였다

밥이 일어선 자리

그 열기 속,

연신 뿜어져 나오는 이, 구수하고 구수한 냄새

둥글고 깊은,

당신 몸의 향기

 

 


 

 

이명 시인(안동) / 백남준의 로봇 K-456 앞에서

 

 

리모컨을 켜자

그 여자는 가슴에 달린 전등을 번쩍이며

노래하고 춤추고 걸으며

딱딱 끊어지는 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몇 번씩이나 눈을 껌뻑였다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모컨을 끄자

그 여자의 속이 텅 빈 사각형 얼굴에서

볼품없이 툭 튀어나온 유방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철골에서

등뼈와 팔다리에서

머리 위로 날리는 은박지에서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리스의 신전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인가

외계의 어느 별나라인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무덤인가

그 무수한 경계를 헤매다가

불현듯 깨어났다 시계를 보았지만

초침은 정지돼 있었다

 

 


 

이명(李溟) 시인(안동)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2010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을 수상을 통해 등단.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벌레문법』 『벽암과 놀다』 『텃골에 와서』 『초병에게』 『산중의 달』. 시선집 『박호순 미장원』 등. 2013년 목포문학상을 수상. 전 한국거래소 최고정보책임자(C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