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차창룡 시인 / 도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3.

차창룡 시인 / 도배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벽지를 바르네

벽지는 사방연속무늬

벽과 천장 가득 벽지를 발라도

한번도 만날 수 없는 얼굴들은

벽지를 바르면서

벽지가 되네

찢어진 곳에서나 얼굴 맞대는

사방연속무늬처럼

진정 사랑할 수 없는 인연이여

찢어지기 전에 얼른

벽지를 바꾸다가

벽을 만드네

세월의 곰팡이를 먹고 자라는 벽지는

쉬 늙어 버리네

흙을 먹고 사는 인간이 흙이 되듯

벽지는 마침내

곰팡이가 되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늙은 벽지는 한숨을 가르치고

곰팡이가 사방연속무늬로 번식하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우리 사랑은

사방연속무늬

이미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곰팡이를 바르고 있네

 

 


 

 

차창룡 시인 / 길 위에서, 길 안에서, 길 밖에서, 길 아래서

 

 

1

오늘도 길을 잃었다. 상도동으로 간다는 것이 가다 보니 왕십리였다. 길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법인가. 조금 잘못 들면 엄청난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길은 아무 말 없이 우리만을 고생시키고는, 자기는 추호의 잘못도 없다는 듯이 아예 변명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수천 수만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길을 만들어왔던가. 그 길은 우리를 먹여 살렸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길에 억압당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고스란히 짐을 지운다. 그렇다고 길을 만들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는 가야 하고, 가야 하기에 길을 만들어야 한다. 길을 만들다 보니 길이 길을 만든다. 그리하여 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있기에 사실은 없다. 없는 길만이 무수히 많다. 우리는 그 없는 길을 법으로 삼아 세상을 살아간다. 윤회의 슬픈 법칙이다.

 

2

길 안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팽이가 돌다 보면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팽이 대신 팽이가 돈다. 팽이 대신 도는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팽이 대신 도는 팽이 대신 팽이가 돈다. 팽이 대신 도는 팽이 대신 도는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팽이 대신 도는 팽이 대신 도는 팽이 대신 팽이가 된 아이가 돈다. 아이는 팽이가 되자마자 팽이가 아니다. 팽이 대신 도는 팽이 대신 도는 팽이 대신 팽이가 된 아이 대신 팽이가 된 내가 돈다. 나도 팽이가 되자마자 팽이가 아니다. 나 대신 아이 대신 팽이 대신 팽이가 된 지구가 돈다. 지구 또한 팽이가 되자마자 팽이가 아니다. 팽이가 된 지구가 돌자 팽이는 멈춘다. 팽이는 멈추어서 돈다. 돈다. 아무리 돌아도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 지구는 지구가 아니다.

 

3

연애나 결혼은 사람을 좀팽이로 만든다. 석가모니는 역시 옳았다. 득도하기 위해서는 연애해서는 안 된다. 아니다. 연애가 그토록 커다란 장애물이라면 그 장애물을 넘으면 곧바로 열반하는 것 아니겠는가. 연애는 득도하기 위한 최고의 고행인 것 아닌가. 아니다. 최고의 고행도 지나친 향락도 모두 득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석가모니의 말처럼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 득도로 가는 길이기에. 그러나 중도를 지키는 것 또한 무지무지한 고행이며, 무지무지한 고행 속에는 또한 형언하기 힘든 쾌락이 스며 있다. 중도 역시 중도가 아니다.

 

4

인간의 관계는 단 두 가지 관계밖에 없다. 애정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 즉 인간을 좀팽이로 만드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 연애는 중도가 아니므로 중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연애 아닌 관계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애정 관계가 없으면 애정 없는 관계도 없으므로, 애정 관계가 오히려 필수적이다. 그러나 애정 관계 또한 없다. 애정 관계는 인간을 좀팽이로 만들므로, 좀팽이가 되면 애정 관계는 있는 채로 없는 것. 애정 관계가 없으므로 애정 아닌 관계도 없고, 따라서 중도 또한 없으며, 중도가 없으니 득도 또한 없다. 그러나 중도든 득도든 길이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준엄한 명령 이어서, 오늘도 없는 길을 찾기 위해 밥을 먹는다. 밥은 먹자마자 없어진다.

 

 


 

 

차창룡 시인 / 고시원에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한때는 갈 데가 없어 이곳에 왔으나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

 

헤어짐이란 고시와도 같은 것

나는 날마다 고시공부하듯 결별의 책을 읽는다

벽마다 책이 쌓여서 무너질까봐

그 위를 무거운 책으로 눌러놓고는

 

나를 포위한 책 속에서 행복하다

책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는

책으로 만든 장작불이야말로

최고의 다비식을 제공할까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바람은

혹은 바람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없는 바람마저 뼛속을 누빈다

뼛속을 빼고는 관속처럼 아늑하여라

창문 없는 내 방이여

 

참 이상하다 사람이란

바람을 피해 바람이 없는 방을 찾더니

바람이 그리워 방을 옮기는 사람이란

바람을 배반하고는 바람에게 배반당하리

 

옮기자마자 북쪽으로부터 바람이 몰려온다

고립의 성채를 두드리는 바람 두려워

나는 확 창문을 닫는다

바람과 함께 들어오던 삼각산이

유리에 이마를 부딪쳐 푸른 피를 흘리는데도

 

-<문학판> 2006년 겨울호

 

 


 

 

차창룡 시인 / 기러기의 뱃속에서 낟알과

지렁이가 섞이고 있을 때

 

 

강가에 물고기 잡으러 가던 고양이를 친 트럭은

놀라서 엉덩이를 약간 씰룩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북으로 질주한다

숲으로 가던 토끼는 차바퀴가 몸 위를 지나갈 때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공기가 되어가고 있다

흰구름이 토끼 모양을 만들었다

짐승들의 장례식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긴 차량 행렬이 곧 조문 행렬이었다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소용없다

자동차가 질주할 때마다 태어나는 바람이

고양이와 토끼와 개의 몸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고양이와 토끼와 개의 가족들은 멀리서 바라볼 뿐

시체라도 거두려고 하다간 줄초상 난다

장례식은 쉬 끝나지 않는다

며칠이고 자유로를 뒹굴면서

살점을 하나하나 내던지는 고양이 아닌 고양이

개 아닌 개 토끼 아닌 토끼인 채로 하루하루

하루하루 석양만이 얼굴을 붉히며 운다

남북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기러기의 뱃속에서

낟알과 지렁이가 뒤섞이고 있을 때

출판단지 진입로에서도

살쾡이의 풍장(風葬)이 열하루째 진행되고 있다

 

-<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

 

 


 

 

차창룡 시인 / 첫사랑

 

 

첫사랑이라고?

웃기지 마라.

 

꽃들은 순 나쁜 연놈들이다.

부모의 몸에 빨대를 찌르고

똥을 고려장(高麗葬)시킨,

하늘과 연애하는 꽃들은

순 호로자식들이다.

존속살해죄로

똥이 될 것이다.

 

첫사랑이라고?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처음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똥을 팍

 

똥냄새가 나는 꽃만이 용서받으리,

이미 벌 받았으므로

 

 


 

 

차창룡 시인 / 천년을 죽어가는 주목나무 아래서

 

 

주목나무 아래서 봄을 만나네

먹구름이 꿈처럼 걷혀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봄이 덩굴식물로 다가오네

우린 사랑을 나누네

봄에도 겨울인 주목나무 아래서

겨울에는 할 수 없는

겨울에도 봄인 사랑을

나누네 구멍이 숭숭 뚫린 주목나무에서

피리소리가 들리네

죽음의 소리라네 바위가

서서히 부서지면서

민들레꽃을 피우네

삶의 소리라네 반은 죽어서

주목나무는 온전히 살아있으므로

반은 살아서

주목나무는 온전히 죽어 있다네

주목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누네

죽음의 사랑이라네 썩어가는

삭정이를 부러뜨리는

 

 


 

차창룡 시인

1966년 전남 곡성에서 출생. 조선대학교 법학과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 박사학위. 1989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 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2010년 봄, 새로운 탑을 쌓는 법을 배우기 위해 출가하여 새로운 세계에서 구도정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