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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현 시인 / 꽃 피는 주머니
한 번도 속을 드러내지 않는 주머니 속이 너무 깊어서 쌀 한 자루도 넣을 수 있는 주머니 가득 차 있는 일보다 비어 있는 일들로 진화해 온 주머니
모금함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가 또 있을까? 혼자서 빛나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주머니일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몇 올의 실밥에서 지붕을 눌러쓴 반달이 딸려 나오고 꽃의 시절에 환하게 빛나던 희극적 순간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그건 모두 다 주머니에서 꽃 피던 일이었다는 것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걸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에서
황미현 시인 /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칸
시끌벅적한 휴게실 화장실 한 칸에 앉아 있으면 한 칸이라는 말이 전지전능한 말처럼 여겨진다. 아무리 바깥이 보채고 문을 두드려도 그 잠시의 권리, 한 칸의 소유권은 절대적이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드는 한 칸. 바늘 꽂을 땅 없어도 자기 소유의 싸늘한 윗목 하나 없어도 누구나 잠깐 주인이 될 수 있는 지상의 한 칸. 자신의 냄새를 만난다거나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마를 찡그리며 힘쓰는 시간.
제 것이라면 똥도 아까워 돌아본다는데, 이 온전한 한 칸엔 든든한 잠금쇠까지 있질 않은가.
반쯤 내린 바지춤을 건너는 시냇물 소리, 속속들이 젖은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잠깐의 명상. 한 칸 속에서 또 다른 한 칸의 주인들이 걸어 나오고 아무 미련 없이 뒷사람에게 내어 주는 살찌는 숲이 자꾸 생겨나는 방.
한 칸. 물고기 배 속에서 구겨진 생각을 바꾼 요나 내가 거쳐 온 한 칸 어머니 배 속 형제들 다 거쳐 간 그곳에서 오롯이 세내어 지내다 온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칸.
-시집 『이렇게 가벼운 주머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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