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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석희 시인 / 언니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3.

주석희 시인 / 언니들

 

 

언니 K는 칡즙을 마신다고 한다

몇 달째 몸속에서 달이 뜨지 않는다고

지하 20층까지 추락하는 우울을

지상으로 길어 올리느라 햇빛 좋은 벤치에 앉아

두 손으로 가위바위보 내기를 한다고 한다

다달이 허물어져 송송 비어가는 몸 관

뜨겁게 목욕탕에 쟁여 넣고

까르르 속눈썹에 수증기를 매달고

도마뱀이 바위를 더듬어 가듯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시들어 가는 얼굴을 수면에서 말갛게 걷어 내며

달의 몰락을 견디는 비법

허물없이 전수하고 있다

 

나는 머리맡 물 한컵

기억하고 잠들기로 한다

오래전 언니들은 정화수에 떠 있는

달빛을 허리 굽혀 모셨겠지만

예고 없이 건기에 접어든 몸 관

악착같이 달라붙는 갈증을 잘라내기 위해

언니들이 앓다간 불면을 털어내기 위해

한 모금의 마중물이 필요한 저녁이다

달빛이 천장에 식은땀 냄새처럼 달라붙어 있다

 

 


 

 

주석희 시인 / 용강리 우편배달부

 

 

제가 용강리 우편배달 일을 한 지는 올해로 5년 됐어요.

검문소를 지나면 시간이 정지된 마을같이 느껴져요.

할머니 혼자 계시는 집이 있어요. 명절 때 굴뚝에서 연기가 나더라고요.

"아들이 올 거야." 하는 거예요. 내가 알기로 아들이 없거든요.

일 년에 두 번 연기가 나요. 명절이 오면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용강리는 오래 산 집이 있고 이사 들어온 집이 있는데

정서가 달라서 그런지 잘 안 섞이는 것 같아요.

용강리는 겨울이 가장 아름다워요. 눈이 오면 오토바이 사고가 날까 봐

우편배달을 못 할 때도 있는데, 용강리에 눈이 오면 며칠이 지나도 눈이 정말 깨끗해요. 아! 예쁘다 하고 마을회관쯤 들어가면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도 마음이 따뜻해요.

몸이 편안해지면서 여기서 며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날은 용강리에서 보구곶리 쪽으로 넘어가다 오토바이를 농로에 세워두고 살금살금 오리걸음으로 가다가 와 소리를 내지르며

철새가 쉬고 있는 논바닥으로 전력질주해요.

새들이 놀라 막 날아오르면 그거 진짜 재미있어요. 한번 해 보세요. 철조망 너머 한강 위로 철새가 날아가는 걸 보면 철조망의 위력을 새삼 느껴요. 새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사람들은 꼼짝없이 철조망에 갇혀 있으니까요. 제가 우편배달을 하는 지역은 월곶면인데 포내리, 고막리, 조강리,

용강리, 보구곶리, 성동리까지 쭉 한 바퀴 도는 거지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우편배달을 하고 토요일은 택배 배달을 하는데 나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요. 용강리 어르신들은 봄이면 몸을 움직이고 활기차 보여요.

그런데 여름이 되면 밭에서 일하느라 쓰러질까 봐 걱정돼요.

어르신들은 자식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으면 몸을 씻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려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 얼굴에 살이 좀 쪄요.

추수를 모두 끝내고 나면 몸도 마음도 좀 편안하신가 봐요.

겨울에는 하도 우편물을 안 가져가 걱정이 돼 문을 두드리면 추워서 꼼짝 안 했다고 해요.

주말에 자식들이 들어오면 용강리는 엄청 바빠요.

농사일 도와야지요, 지붕도 고쳐야죠, 땔감 나무도 해야지요.

용강리 주민들은 청룡회관으로 가끔 단체로 목욕도 다니고 그래요.

어르신들께서 아프지 말고 내내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이건 비밀인데요. 용강리에는 나만의 쉼터가 있어요.

이장님집 앞 배밭 위로 걸어 올라가면 길은 없는데 그늘지고 바위도 있고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이 나는 곳이 있어요.

용강리 들어오기 전까지가 우편배달이 많이 바쁘거든요.

그 쉼터에서 한숨 돌리며 조금 쉴 때가 조용하고 너무 좋아요.

지금이라도 차가 있고 용강리에 땅이 좀 있으면 용강리에 집 짓고 출퇴근하고 싶어요.

어르신들께서 여름에 덥다고 찬물도 내주시고, 이제 정이 들어서 어머니 아버지 같거든요. 이번 겨울에 눈 오면 용강리 한번 꼭 다시 가보세요. 평화로운 풍경에 반하실 거예요.

서른여섯, 예의바르고 씩씩한 이지성 씨가 고향마을을 자랑하듯 신신당부합니다.

 

 


 

주석희 시인

1966년 경남 하동 출생. (본명 주영숙). 계간 《포엠포엠》 2013년 겨울호에 당선되어 등단. 2019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인학교詩냇물 회원. 한국작가회의 詩분과 회원. 2015년 중봉문학상 수상. 시집 『이타적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