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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시인 / 공장장
병아리 부화 공장에 다닌 적 있어요 컨베이어 벨트에 병아리들이 나와요 양손으로 잡아 들고 여자 남자 갈라요 여자애들은 기계 속에 쏙 떨어져요 거기서 부리를 갈리고 주사도 맞아요 화난다고 다른 애를 쪼아 버리면 안 되잖아요 규칙이 필요해요 남자애들은 산채로 분쇄기에 들어가요 끝이에요 잘 처리됐어요 우리는 알을 낳을 닭이 필요한 것뿐이죠 괜찮아요 불법이 아니에요 오늘도 쌍용동의 한 아이(2)가 먼지처럼 죽었어요 바닥에 오줌을 쌌다고 목 졸려 죽었어요 엄마는 오줌 닦듯 아이를 치워 버렸어요 괜찮아요, 미워서 그랬어요. 우리는 조용한 아이들이 필요한 것뿐이죠.
-시집 <나는 그때 다 기다렸다>에서
정다운 시인 / 각자의 세상
어떤 연애는 우화같다 예를 들어 그는 나쁜 나라에서 태어났다 의사였으면 사람을 여럿 살렸다 애인이 한 무리의 짐승들에 둘러싸여 난자당했을 때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했다 기구 기술 기도 쏟아진 걸 도로 담을 순 없었다 자신의 두 손을 잘라내고 싶었으나 가족이 애원했다 살라고 했다 살려면 떠나라고 했다 그의 몸은 그렇게 이곳으로 왔다
그해 봄 버스 안에서 그는 나를 만난다 눈이 마주친 사람을 끝까지 볼 줄 아는 어리고 용감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버스 안으로 꽃잎이 날아드는 빤한 인트로를 보고도 어쩌면 다른 이야기가 될 거라며 덮지 못했다
축제에 가고 싶었다 토마토 축제 문신도 해보고 싶었다 그의 이름 쇼핑을 하다가 맥주를 마시러 가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몸에 묻히고 싶은 게 없었고 약속하고 싶은 게 없었으며 꽃도 맥주도 사주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나를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억하겠다고 했다
울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선물이 받고 싶어서 인생의 고비가 여기인거 같아서 그는 나에게 혀를 넣고 나를 움켜쥐고는 옥상으로 데려가 보여 준다 피가 말라붙고 짐승의 혀만 살아 움직이는 기괴한 곳 불타고 환했으며 가루가 되어 단단해지는 곳 그는 그런 곳에 살고싶다고 했다 그의 옥상에서는 세상의 한쪽만 보였다
내 방에 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우린 다른 것을 보고 있다고 내 방은 숲도 사막도 아니고 환상이 터지는 분홍 벽지도 없지만 식은 침대 좋아하는 의자 정도가 있을 뿐이지만 발이 시리면 양말을 신고 낙서 위엔 사진을 붙이면 되었다 그가 와 준다면 청소를 하고 과자도 까고 속옷을 갈아입었을 것이다 더 가까이 붙어 앉아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났을 것이다
그는 오지 않는다 피곤하다고 어쩌다 기막히게 멋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자기변명으로 가득 찬 멍청한 카드 한장을 남기고서
실연의 기분은 견디기 어렵다 졸지에 내가 보는 세상은 음란하고 폭력적이 되었다 다정했던 날들은 벗겨지고 맞은 뒤에야 구석으로 기어가 쉴 수 있었다 밤새 천장에 묶여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가슴 두 쪽만이 대롱거렸다 아무도핥아 주지 않아 가여웠다
이제 돌아가는 건 글렀다 많은 이야기의 주제처럼 어쨌든 나아가야 한다 나약한자는 약에 빠지고 조악한 자는 더 비틀리면서 바깥은 보는 대로 변해갈 것이다 다음에 내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왜 이만큼밖에 해줄 수 없는지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의 방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두 인물은 운이 좋으면 같은 곳에서 늙어 가게 될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다른가, 하고 의문을 품게 되겠지 자기만의 불완전한 세상을 감사하느라 피곤해지겠지 아무도 잘못한게 없으나 누구나 외로울 것이다
-시집 『파헤치기 쉬운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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