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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경 시인 / 저녁에 길을 걸었다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5.

이은경 시인 / 저녁에 길을 걸었다

 

호두나무 사잇길을 걷는다

낮은 집들의 먼지 낀 창으로 저녁 불빛이 새어나오고

교회 첨탑 끝 십자가가 호두나무 가지에 걸린다

길옆 수풀 속 꽃들이 한낮의 꽃잎을 접을 때

낯선 집, 낯선 골목처럼

섧은 저녁 발걸음이 자꾸만 헛디뎌진다

어둠 속에 오롯이 서 있어 보았다

거기, 외려 또렷한 것들이 있다

나는 왜 한번도 저렇게 목 놓아 울지 못했는가

물 고인 논마다 개구리들 악을 쓰고 울어댄다

마음속엔 또 하나의 돌부리가 있다

삽을 가로 싣고 지나가는 자전거의

바퀴 두개가 이내 어둠 속에 숨어버린다

전신주에 매달린 흐릿한 불빛마저 뚝 끊기고

불빛아래 모여들던 나방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산기슭의 어둠은 더 깊고 스산하다

아플 수 있다면 제발 내가

개구리 울음소리 밤이 깊을수록 더 분명해지고 있다

한낮, 차부에 날리던 흙먼지들처럼

가엾은 슬픔들이 길 위에 흩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나는 부유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았다

논물 아래 어리는 달빛을 껴안고

나는내가 만들어놓은 발자국들을 꾹꾹 누르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쓸쓸했으며

그리고 또 심약했다

 

-2003년 현대시 등단작

 


 

이은경 시인

196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2003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