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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시인 / 저녁에 길을 걸었다
호두나무 사잇길을 걷는다 낮은 집들의 먼지 낀 창으로 저녁 불빛이 새어나오고 교회 첨탑 끝 십자가가 호두나무 가지에 걸린다 길옆 수풀 속 꽃들이 한낮의 꽃잎을 접을 때 낯선 집, 낯선 골목처럼 섧은 저녁 발걸음이 자꾸만 헛디뎌진다 어둠 속에 오롯이 서 있어 보았다 거기, 외려 또렷한 것들이 있다 나는 왜 한번도 저렇게 목 놓아 울지 못했는가 물 고인 논마다 개구리들 악을 쓰고 울어댄다 마음속엔 또 하나의 돌부리가 있다 삽을 가로 싣고 지나가는 자전거의 바퀴 두개가 이내 어둠 속에 숨어버린다 전신주에 매달린 흐릿한 불빛마저 뚝 끊기고 불빛아래 모여들던 나방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 산기슭의 어둠은 더 깊고 스산하다 아플 수 있다면 제발 내가 개구리 울음소리 밤이 깊을수록 더 분명해지고 있다 한낮, 차부에 날리던 흙먼지들처럼 가엾은 슬픔들이 길 위에 흩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나는 부유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았다 논물 아래 어리는 달빛을 껴안고 나는내가 만들어놓은 발자국들을 꾹꾹 누르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쓸쓸했으며 그리고 또 심약했다
-2003년 현대시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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