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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덕남 시인 / 종이인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5.

윤덕남 시인 / 종이인간

 

 

축축이 젖은 종이로 태어난 순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풀거리는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세상에 태어나 배운 것은 필요 없는 부분은 오려내고

세상에 어울리기 위해 흰 부분을 색칠하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오려낸 부분은 휑하니 텅 빈 듯 보였고

너무 많이 색칠한 부분은 더 이상 칠할 수 없었다.

 

무거운 동전들보다 가벼운 지폐들이 어울렸다.

기억할 일들이 있으면 종종 아무 곳이나 기록해 놓았다.

거의 누군가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그리고 계좌번호였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허우적거렸다.

툭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그곳은 멍자국이 생겼다.

멍자국은 점점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고

과거가 쌓이고

현재도 지나가고

 

어느 순간이 되어보니 곳곳이 구멍이 나고

조각조각 가위질 되었고 온통 검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나풀거리지도 못하고

더 이상 가위질도 색칠도 가능치 못하게 되자

빨간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한 줌의 재가 전부였다.

그것도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윤덕남 시인 / 그림자

 

 

그것이 언제부터

나에게 달라붙어 있었는지 모른다.

 

기억의 모닥불 주위를 맴돌며

그것이 춤을 추고 있을 때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내가 생각의 뿔을 내밀 때마다

그것은 나와 달라붙어 있었고

내 생각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그것은 대심문관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일어서고 누울 때마다

나의 시간을 모호한 웅덩이로 몰아넣었다.

 

내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내 삶이 야생 고사리처럼 돋아나는 순간까지

그것이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이

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은빛 라이터 불꽃에

아버지의 유품인 라이터 불꽃에

그것을 태워 보려는 망상이 일어났다.

 

눈부신 불꽃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다

아버지가 들어간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 몸에서 돋아난 거무스름한 곰팡이라고

아니면 엎질러진 검은 생각이라고

그렇게 치부하고 싶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윤덕남 시인

1969년 충남 장항 출생. 침례신학대 신학과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계간 <현대시문학> 단편소설 당선. 2012년 창조문예 시 신인상 수상. 2014년 <시인동네>로 등단. 현재 〈기독교신문〉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