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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교 시인 / 파도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6.

이경교 시인 / 파도

 

 

 내가 바다의 일부였거나, 바다가 내 몸의 일부였을까요 젖을수록 흔들리기도 쉬워서, 내 입은 소리나는 쪽으로 기울어졌지요 몇 겹으로 뒤틀린 내장은 물론, 저 흐린 심연을 본뜨곤 하는 내 의식이 그래요

 

 비바람이 내 오장육부를 통과할 때, 문 안에서 내 몸은 소리치고, 그때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이 함께 울었을까요

 

 태풍의 시절은 그렇게 끝나고, 내가 그리워했던 풍경들은 물굽이 아래로 쓸려가고, 몇 번이고 낯선 풍경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 무렵, 그래요, 역사도 사랑도 한몸처럼 소리없이 스며드는 일이었군요

 

 격랑의 끝마다 거기 해안선이 곱게 그어지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랑도 역사도 잊혀지는 일이라는 걸, 나 오랫동안 잠 못 이룬 뒤에야 알았지요

 

 


 

 

이경교 시인 / 꽃을 든 남자

 

―부처가 꽃 한송이 들어보이자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꽃 한송이 들어보이자, 지상의 나무 한 그루 몸을 떠네, 꽃을 숨긴 그 몸에 소름이 돋네

 

 나는 왜 긴 세월 꽃에 대해 침묵했나, 꽃의 과거를 물그늘 속에 감췄나 누군가의 미소가 내 안을 훑고가자 추억이 따끔거리네, 미소란 언제나 독毒이거나 따스한 결림인지 모르네

 

 입술을 벌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무덤의 입구에 다다른 것이니, 꽃잎을 거두어 설편雪片의 내장을 들여다보네 사실 그의 한 생이 조각조각 눈물로 짜여진 거울이었으며, 육각의 꽃모양조차 슬픔을 위장한 포장이었으니

 

 그가 꽃 한송이 들어보여도 이제 웃는 이 없네 그럼, 눈물이 꽃을 빚는 것인가? 누군가, 내 안의 눈물샘을 또 긁고 있네

 


 

이경교 시인 / 꽃사태

 

 

지상의 모든 무게들이 수평을 잃기 전, 다만

햇빛이 한번 반짝하고 빛났다

 

저 꽃들은 스스로 제 안의 빛을 견디지 못하여

그 광도光度를 밖으로 떼밀어 내려는 것

야금야금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스스로 빛의 적층을 이루던,

빛도 쌓이면 스스로 퇴화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

도대체 누가 그 붉은 암호를 해독했을까

이웃한 잔가지 한번 몸을 떨 때마다

일제히 안쪽의 문을 두드려 보며

더운 열꽃처럼 스스로 제 체온을 덜어내려는

꽃들의 이마 위엔 얼음주머니가 얹혀있다

 

체온의 눈금이 떨어질 때마다 연분홍 살 속에 꽂혀있던

눈빛들은 다시 컴컴한 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몸을 흔들어 수평을 허무는 꽃들이

어두운 고요 속에 일제히 틀어박힐 때

 

문을 닫기 전, 다만

햇빛이 한번 반짝하고 빛난다

 

 


 

 

이경교 시인 / 카페트를 짜는 밤

 

 

 거미가 예술가로 등재된 건 중세 훨씬 전이다

 수메르인들의 쐐기문자나 페르시안 카페트 역사 이전부터

 거미는 온몸으로 글자를 쓰고 문양을 찍어 왔으니

 아름다운 건 왜 두려운지, 치명적인 것일수록 눈이 부신

 까닭을 설명할 순 없지만

 

 저 거미집이 제 살을 헐어 짠 카페트라면

 허공에 매달린 글씨라면, 누군가 그걸 읽어줄 때까지

 거미의 죽음도 그만큼 미루어졌으리라

 아랍어 문자 속에선 이따금 거미가 꿈틀거린다

 별과 달이 떴다가 지고, 은실의 카페트가 펼쳐진다

 어느 신비주의자는 거미가 자신이라고 우긴 적 있지만

 내 몸에서도 은실 타래 술술 풀리거나

 까닭없이 툭툭 끊어질 때 있으니, 보아라

 저문 바다, 안개 낀 부두를 지나가는 나귀

 나귀는 등이 휘고, 거미는 지금 몸이 결린다

 

 내가 늦은 밤 글씨를 쓰는 동안

 거미는 꽝꽝, 허공에 인장을 찍고 있다

 달무리를 건너와 종이 카페트 위에 그 무늬 박힌다

 펜을 쥔 내 손마디 아라비아해 쪽으로 휘어지고

 왼쪽 어깨가 몹시 결린다

 

 


 

 

이경교 시인 / 비파나무

 

 

 비파나무는 결림이라고, 스물 몇 해 전 남해금산, 저 나무 아래서 쓴 적이 있네 그 결림 얼마나 향기로운지 온몸에 노란 악기 주렁주렁 매단 열매들, 가지 끝으로 번지던 슬픈 선율들

 

 나무는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내 몸이 악기의 울림통으로 바뀌는 사이, 소리의 즙은 얼마나 고였을까 비파나무를 따라온 스물 몇 해 푸른 잎 다 낡아가는 동안 노래는 언제 다 마르나 비파나무와 나는 어떤 울림으로 이어지나, 내가 비파나무와 눈을 맞춘 그 순간, 내 몸에도 나이테처럼 결림이 새겨진 건 아닐까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이경교 시인 / 나는 죽은 사람이다

 

 

 아비는 죽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징용에 차출되어 탈출할 때, 죽을 고비를 제대로 넘겼지 이제 나는 식민지인이 아니다! 기쁜 눈물이 마르기도 전 다시 6·25가 터진 거야. 이번엔 인민군에 끌려가게 되었지 산기슭에서 단체로 똥을 누고 있었지 상상이 되니? 숲 그늘마다 빼곡히 앉아 똥을 싸는 청년들… 내장까지 다 버리고 싶었지 외로움의 빛깔은 어스름 빛이란 걸 알았지 문득 눈앞에 옻나무가 환하게 서 있더구나 어스름이 등불로 바뀔 때도 있지 그게 뭘 의미하겠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 옻나무 순을 꺾어 천천히 밑을 씻었단다 밑이 뜨거워진 건 옴이 내장을 적셨기 때문이지 내장인들 얼마나 놀랐겠니? 온몸이 불덩이였지 좁쌀 같은 발진이 혀와 동공을 뒤덮었을 때, 죽은 나를 버리고 그들은 떠났단다 그때 아비는 죽음과 내기를 한 거야 아비는 부활을 모르지만, 죽은 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 마른 등불, 혹은 끈끈한 옻나무 진, 그 사이로 흐르는 하얀 목소리, 그 흰빛에 싸여 부활은 천천히 걸어왔단다

 

 죽음에게 시비를 걸다가 호되게 당했지 불경스럽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 고을에서 최초로 부활한 농부였으니까

 

 


 

 

이경교 시인 / 의자들

 

 

 나는 방금 의자 속으로 돌아왔지, 내가 의자에 드는 순간 의자는 이곳을 떠나지 내 엉덩이는 한 의자의 부재를 기억하기 위하여 텅 빈 장소가 필요하지 의자의 부재는 다시 의자를 낳지만, 나는 엉덩이를 들어올려 의자에서 나오지 그 순간, 의자는 다시 돌아와 의자 밖을 오래 배회하지 한층 부산해진 의자들 주변으로 몇 개의 엉덩이들이 출몰을 반복하지 의자는 또 떠나거나 돌아오지만 나는 의자로 돌아갈 수 없지 의자가 두려워 의자에서 멀어지는 동안, 의자는 의자에게서 빠져나와 고개를 숙이지 의자에서 멀어질수록 의자들은 의자를 더 잘 보지

 

 의자가 잘 보이는 곳에 의자들이 모여 있지 이곳은 의자들의 수도원일까 침울한 의자들의 얼굴, 어쩌면 고아원인지도 모르지, 너무 눅눅한 마룻바닥을 보면, 의자의 장례식장을 의심해보기도 하지

 

 


 

 

이경교 시인 / 해변의 장밋빛 정원

 

 

 그가 방에 불을 켰을 때, 들창마다 장밋빛 꽃물이 흘렀다 마지막 갈매기가 다리를 끌며 돌아가자, 하늘에 실금 하나 그어졌다 나는 노을이 흔드는 방울소리를 듣고 있었고 그는 붉게 물들어 문지방을 넘어왔다 길들이 침구를 펼칠 무렵이면, 누구나 죽음에 대해 골똘해진다 문득, 감탕나무 눈빛이 한없이 깊어진다

 

 열기는 서늘해지기 전, 반드시 장밋빛의 과정을 거친다 그 빛깔이 애무와 비슷해서 우리는 서로 붉어졌다, 붉은빛은 검은빛과 쉽게 섞이고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어둠 밑에서 꾸물꾸물, 장미가 꽃을 준비하는 동안

 

 


 

이경교 시인

1958년 충남 서산 출생. 동국대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시집 『이응평전』 『꽃이 피는 이유』 『달의 뼈』 『수상하다, 모퉁이』 『모래의 시』 『목련을 읽는 순서』 『장미도 월식을 아는가』. 저서 『한국현대시 정신사』 『북한 문학강의』. 수상록 『향기로운 결림』 『화가와 시인』 『낯선 느낌들』 『지상의 곁길』, 역서 『은주발에 담은 눈』.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