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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 시인(삼천포) / 바람의 안쪽 바람의 안쪽은 바람이 비 사이로 불 때 건조한 채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방문을 열면 발자국이 먼저 들어와 있는 방, 적막은 혼자여도 적막해 모서리들의 귀엣말을 본다 벽은 어둠을 품어 부풀어 오르고 밖이 먼저 들어와 있는 창문은 없는 계절처럼 투명해 여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모서리로 한쪽 모서리는 다른 쪽 모서리로 가는데 폭설을 불러서 걸어 볼까 병(甁) 같은 골목을 캄캄히 비추는 밤의 꽃잎들 방은 유리 벽도 아닌데 그 곤궁이 밖에서도 환히 보이고 저쪽을 이쪽에 이쪽을 저쪽으로 옮겨 놓아도 똑같은 풍경들 설레던 방을 잊는다는 건 너의 얼굴에서 내 눈을 빼는 것, 눈물이 나도록 바라보다 눈이 멀기를 바라는 것 새들이 놓고 간 계절이 방에 푸른 물을 잔뚝 풀어놓았다 양피지에 돋아나는 별자리를 따라 발이 붓는 방, 느릿한 물살에 발목을 넣는 새와 애도의 땅에서 발을 빼는 인간이 같은 별자리를 갖지 않기를 바라는 벽들의 말, 하다 만 이야기를 두고 나온 그 방엔 지금 어떤 별들도 뜨지 않는 어둠이 있다 다시 방에서 창으로 창에서 방으로 계절이 끊긴다 들리지 않을 애도 따위는 밀려가길 바라는 엎드린 방, 웅크린 자세로 슬픔 따위는 모으지 않기를 바라는 비 오고 바람의 안쪽, 그 마른 쪽은 쉬 젖지 않겠다 *바람의 안쪽은 바람이 비 사이로 불 때 건조한 채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밀로라드 파비치.
이미화 시인(삼천포) / 치통의 아침
밤새 한숨도 못 잔 볼을 본 적 있니 오른쪽 왼쪽 크기가 다른 볼을 본 적 있니 사과가 되고 싶었던 거지 과일이 되고 싶었던 거지 왼뺨과 오른뺨이 다른 태양이 되고 싶었던 거지 달님이 되고 싶었던 거지 이슬이 되고 싶었던 거지 구름이 되고 싶었던 거지 구름은 자주 얼굴이 변해 아침에 본 구름도 어제저녁 구름과는 달랐어 구름의 얼굴을 갖고 싶은 나는 요동을 쳤고 새가 되었다가 꽁지 빠진 새가 되었다가 옆구리 터진 새가 되었다가 추락하는 새가 되었다가 한숨도 못 잔 볼이 되어 아침을 맞았지 이쪽 뺨과 저쪽 뺨이 다른 아침을 맞았지
이미화 시인(삼천포) / 전망 값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버텼더니 전망 값을 얹었으니 내놓으란다 능선 베고 누운 월아산자락 반짝이며 흐르는 남강 줄기 논물 잡아 찰방대는 들판 이 모두를 가격으로 매긴 주인의 셈법이 참 대단하다 어떻게 알았을까 물 바람 언덕 나무들도 그들의 몸값이 따로 있다는걸 아무리 우겨도 값을 내리지 못하겠노라는 집 주인은 대체 그 값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미화 시인(삼천포) / 맨드라미들의 노래
시각장애인들에게 내 친구는 노래를 가르친다 햇살의 혀에 달린 노래로 담장 아래 핀 맨드라미들 열정적이다 눈먼 사랑을 선곡해온 선생님 민망할까 봐 여기는 다 눈먼 사람뿐이라며 교실 안 화르르 꽃 피우는 사람들 더워서 옷 벗는 것도 이곳에선 개그가 된다 옷 좀 벗겠다는 선생님 말에 아무도 못 본다는 화답 누가 알아요 벗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일지 햇살의 혀끝에서 개그가 만개한다 눈먼 학생들과 척척 죽이 맞는 내 친구가 가르치는 교실엔 노래와 개그가 있다 붉은 맨드라미 꽃이 있다
-시집 <그림자를 옮기는 시간>에서
이미화 시인(삼천포) / 젠가
우리는 나무 평상에 앉아서
방금 옆자리에서 백숙을 먹다 화투패를 돌리는 사람들처럼 닭들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그래 내기니까 집중해야 한다니까 닭보다 내기에 더 마음이 쏠렸다
주인은 털이 잘 뽑힌 닭은 두 시간째 찜솥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두 시간은 나무가 평상 이쪽 모서리에서 저쪽 모서리로 그림자를 옮기는 시간
패를 잘못 빼거나 실없이 옮기면 둥근 손 안에 쥔 젤리처럼 쫄깃한 맛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빼고 쌓고 무너지고 다시 쌓고 빼고
압력솥이 신나게 추를 흔들며 김을 뿜는다
이미화 시인(삼천포) / 뒤꿈치에 관한 명상
올림픽 장거리 선수들이 달린다 하나같이
앞사람 뒤꿈치를 보며 달린다 다리뿐인 홍학 같다 앞사람이 왼발 거둬 가면 뒷사람은 재빨리 그 자리에 왼발 던져놓는다
매스게임처럼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저 홍학들 아슬아슬한데, 달리다 홍학이 홍학을 밟아 넘어뜨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앞사람 뒤꿈치는 종교다
경전은 오래 달릴수록 아래를 보고 앞사람 뒤꿈치를 보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다리만 내뻗는 선수들
네 왼쪽 뒤꿈치가 있던 자리에 내 왼발이 착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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