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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휴 시인 / 희망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8.

김휴 시인 / 희망가

 

 

끈기는 삶의 투지다

그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가는 힘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

 

시련도 달게 받으면 보약이 된다

쓰고 매운맛도

단맛으로 바꾸는 힘

바로 자신감이다

 

성취는 시련없이

기대할 수 없는 것

고통은 행복의 씨앗이 되어

희망의 어머니로 되돌아와

내일의 출발에 힘을 싣는다

 

 


 

 

김휴 시인 / 양지, 그리고 음지

 

 

힘들게 오른 정상

쨍한 햇살 받으며

뜨거운 환호소리

뭉클한 감격

눈시울 적시네

매듭을 풀었다는 당당함이다

 

비오는 날 차가운 냉기

좌절의 몸부림 속

비정한 코웃음에

하염없는 설움

눈시울 적시네

풀지 못한 한의 미안함이다

 

 


 

 

김휴 시인 / 공중

 

 

사람들 얼굴마다 살얼음이 끼였다

 

눈가리개를 하지 않겠다는, 길들여지지 않는 그것을 목매달았다

낮은 공중이었다

이 무렵은 깊이보다는 높이가 끝의 농도였다는 것을

 

바닥에 묻힌 생명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마우스피스가 물

린 입처럽 사람들은 터치를 두려워했다 궁여지책으로 새가 되

려했다 쇳조각 같은 말들을 토해내며 가벼워지려 했지만 새의

길들이 철근처럼 단단히 얽혀진다

 

실패한 사람들은 새의 일부를 가지고 아찔해하거나 걸려 펄

럭거리거나 시조새처럼 걸어 다니거나

 

오히려 불쑥 들이닥친 불행처럼,

한 무리 새떼가 솟구치더니 공중이 뚫렸다

펑펑 눈이 쏟아진다

 

뚫려 쏟아졌지만 공중은 전혀

 

-시집 『물을 연습 중이다』에서

 

 


 

 

김휴 시인 / 엄마의 첫날밤은 얼마나 푸르렀을까

 

 

 나비처럼 잠든 가여운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물어보았지만 엄마는 곤충의 도감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밤마다 깊은 강을 건너오다가 악어의 거친 입속에 알을 낳은 여자가 유일한 곤충이었다

 

 눈을 감으면 관계의 끝이었던가

 

 그 무렵 저질러진 사건이었을지도 모르지 수없이 뛰쳐나오는 맨발들,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겨울별자리, 마지막 장면은 무조건 얼어 죽는 벌판이었다 숨죽이고 기어 다니는 음률에서

 

 엄마는 죽은 나비의 살코기를 다지고 있었고

 

 차라리 내 붉은 간을 엄마에게 내놓을게요

 

 호텔캘리포니아로 도망가요 거긴 결코 들키지 않을 불륜이든지 아니면 감쪽같은 몸의 지옥일거야 우린, 우리가 꾸며놓은 의식에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채찍을 맞으며 기뻐하기로 해요

 

 첫날밤은 당연한 의심, 눈부신 핏줄이 그물처럼 엮인 잠자리는 아직도 애벌레 상태, 나쁜 남자야 겨울나무의 알몸은 기어오르면 안 되는 거야 무의미해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비명을 지르는 별자리는 새벽에 죽어나간 상반신이었을까 배가 불러오던 여자를 뜯어먹은 벌레의 몽롱한 자세를 세상에 없는 별자리라 생각하면 방금 문자가 도착한다

 

 이제 옷을 입혀줘요 당신의 지문을 따라 흐르는 강이 너무 깊어요 살과 살이 닿는 자리마다 꽃이 죽어요

 

 알을 품고 다니던 엄마는 더 모욕적이었고 맨발로 돌아다니는 엄마는 추상적이라서 마주치는 엄마마다 도망친다

 

 때려죽여도, 없었던 첫날밤을 보여 달라며

 유리병보다 더 투명한 치마를 입혀주었다

 

-시집 『물을 연습 중이다』에서

 

 


 

 

김휴 시인 / 새의 무렵

 

 

마침내 죽은 새를 받아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린다

 

눈의 사치를 부정하면서 아파야 느껴진다

구체적이지 못한 경로로 몽정처럼 흐린 체온들이 번식하겠지만 이미 먼 곳에서부터 야위어갔다 맨발로 돌아다니는 새의 변성기는 우울하다 바람 밖에서 바람은 불량할 수밖에 없고 떠돌던 투명은 제 농도를 자책했던 그날 이후 사라져버렸다

 

새가 새를 버리고 떠나가는 계절을 자작극이라 말해버리면 한 번도 의도적이지 않은 공중을 표절하기는 미안하다

 

종이비행기를 띄우는 것으로 어제의 불편함을 지우겠다는 나태함, 얼굴에서 얼굴로 붙어먹는 깃털들, 가라앉는 정적을 위해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공기의 고백들, 떨어져 죽었지만 여전히 무겁게 굴러다니는 이중성, 그림자는 죽어라 도망치고

 

새의 알몸도 포로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치킨집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려 했지만

상상까지 불사르는 살의 오페라는 얼마나 극적이었을까

 

이반은 떠도는 것에서 시작되고

나쁜 깃털이 제 근원을 그리워하면

 

중력의 치유를 위해 때맞춰

그 새를 복용해야 하는

 

너무나 불길한 새의 무렵

 

 


 

 

김휴 시인 / 겨울해부학 2

-엄마에 대한 바람의 메모에서는 달이 지지 않았다

 

 

 얼굴이 얼굴을 뜯어먹고 있을 때는 쥐떼를 따라다니며 아버지를 흉보던 시기, 자고나면 베개에서 분홍 벌레가 얼어 죽은 시간은 꿈의 이유를 다시 조립하기에는 너무 난해하다는 생각,

 누구의 등 뒤에서 앙상한 나무와 수군대는 일은 이불 속에서 몰래 눈을 씻는 쾌감, 새의 혈액형과 공중의 혈액형이 달라서 지붕에 떨어진 종이비행기가 푸른 뱀이 되겠다는 결심,

 새떼를 바라다보며 화장을 하는 누나의 젖가슴은 아직도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오는 북쪽, 밥을 먹다가 덫에 갇힌 사건은 아버지가 마침내 쥐가 되었다는 아이의 일기, 사과를 깎다가 베인 손가락에서 무지개가 뜨면 고해성사의 끝 무렵,

 내 눈을 삶아내는 밤은 예수를 떠메고 지하로 숨어드는 난민 이야기, 아침에 허리에 감고 나간 뱀을 풀어놓는 귀가는 극지에서 돌아온 사냥꾼의 노쇠현상, 사막에서 막 도착한 낙타가 혀의 뜨거운 여정을 위해 모래의 나태한 철자법으로 노트하는 기후는 무조건 진실,

 몰래 뒷물을 하는 엄마를 훔쳐보는 밤이 시가 되는 새벽은 모호한 슬픔, 도대체 영문을 모른 채 내가 오래된 유물로 묻혀있기로 한 지층은 나의 혈액형, 나보다 더 못난 신이 내 꽃말을 단두대에 걸쳐놓는 연극은 엄마의 긴 모가지 부분,

 

 


 

김휴 시인

2006년《현대시》로 등단. 본명: 김영섭. 2001년 빈터 온라인문학상 수상.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 수상. 시집 『물을 연습 중이다』.  2010년 아르코 창작지원금 수혜. <빈터>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