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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재황 시인 / 못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8.

김재황 시인 / 못

 

 

애초부터

어디엔가 박혀야 될 운명이라면

그대 가슴에 파고들어가

믿음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그대 안에서 뼈대 같은

사랑으로 서고 싶다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서

 

 


 

 

김재황 시인 / 그 이름 조선소나무

 

 

이 땅 어디를 가든지 마주치는 그대 얼굴

메마른 자리 골라 그 발끝 힘주어 딛고

바늘잎 내세운 뜻을 다시 새겨 바로 선다.

 

긴 그림자 짧게 끌며 언덕에 선 그대 숨결

미끈한 그 몸뚱이 수줍은 듯 홍조 띠면

춘양목 반듯한 가르마 푸른 정절 살아난다.

 

저 산 깎아지른 벼랑 올라가는 그대 모습

먹구름 낄 적마다 그 가슴 다시 조여도

조국의 예전 이름을 가지 위에 걸고 산다.

 

 


 

 

김재황 시인 / 동학사에서

 

 

골짜기 가린 숲에 머문 새는 멀어지고

꿈결에 뒤척이면 솔 냄새가 이는 바람

천수경 외는 소리만 기둥 위로 감긴다.

 

어둠을 밝혀 가는 믿음이 곧 하늘이라

구름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젖은 눈길이 고운 미소 남긴다.

 

그림자 끌던 탑이 별자리에 앉고 나면

버려서 얻은 뜻은 산 마음을 따라가고

숙모전 가려운 뜰도 물빛 품에 담긴다

 

 


 

 

김재황 시인 / 묵혀 놓은 가을엽서

 

 

하늘이 높아지니 물소리는 낮습니다

지나온 길 멀어지면 귀도 멀게 된다지만

이 밤도 지친 발걸음 젖어 닿는 그대 기척.

 

붉게 타다 떨어지는, 꼭 단풍잎 아픔만큼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껏 띄우지 못한 빛깔 바랜 나의 소식.

 

고요를 깨문 바람 가득 안은 한겨울밤

빈방 같은 내 마음에 녹차 두 잔 따라놓고

그 어둠 멀리 던지는 그대 손을 잡습니다.

 

 


 

 

김재황 시인 / 사는 길

 

 

눈 번쩍 환하도록 거침없이 만나는 것

스스로 그 마음이 휘어지게 가닿는데

누구도 내가 사는 길 막아서지 못한다.

 

꼭 맘껏 고르는데 바꿀 일은 없겠는가,

잘못을 알게 되면 얼른 옳게 고쳐야지

아무도 네가 사는 길 참견하지 않는다.

 

줄을 맨 코뚜레로 이리저리 이끄는 듯

하늘이 하라고 한 명령일 때 어찌하나,

온 힘을 한곳에 모아 앞으로만 달린다.

 

 


 

 

김재황 시인 / 만나면 절하다

 

 

세상을 살아 보면 만나는 게 고마울 뿐

 

기뻐서 마주 보며 서로 웃는 꽃이 된다

 

사는 게 별것 있을까 아끼는 일 그밖에

 

 


 

 

김재황 시인 / 단풍 이미지

 

 

뭣 때문에 그러하게 서두르며 살았는지

왜 그리도 사는 일이 바쁘기만 하였는지

물으면

어느 잎들은

붉은 물이 듭니다.

 

푸른 하늘 바라보기 부끄럽지 않았는지

주먹 쥐고 걷는 길에 베풀기는 잘 했는지

제풀에

어느 잎들은

붉게 젖고 맙니다.

 

 


 

 

김재황 시인 / 서울의 밤

 

 

서 있기만 하던 숲이 흔들리고 있다

지붕을 타고 내려 모퉁이로 기는 바람

불을 켠 포장마차가 밤거리를 흐른다.

한 순간을 잊어 보는 시름은 아직 남아서

뒤밟는 검은 영혼 그림자를 떨치려고

한 잔 술 취기를 입으면 앞서 가는 가로수.

갈라진 건물 틈새 절어 있는 주름진 때

달빛이 그늘을 일궈 밤벌레를 들춰내면

개구리 하얀 울음이 숯불 위를 걸어간다.

아득한 심연으로 수초 같은 혼이 잠긴

명멸하는 불빛들이 비늘처럼 박히는데

비비는 어둠의 소리 쓸려 오는 갈대 소리.

정해 둔 수심도 없고 열어 논 물길도 없다

드리운 꿈을 입질해 낚이는 허무를 따는

거리의 주정꾼 하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김재황 시인 / 까치놀

 

 

몸으로 종을 울려 맺고 풀던 그 참사랑

한 줌 잔영이 남아 은비늘로 박혀 들면

하늘귀 바다에 열고 회심곡을 듣는 자리.

 

 


 

 

김재황 시인 / 저 하늘을 바라보며

 

 

너무나 멀고 깊어 내가 닿을 수 있을까

그 물빛 너무 맑아 나도 머물 수 있을까

가만히 바라다보면 왠지 자꾸 눈물난다.

 

어둠이 깔릴 때면 더욱 감감한 속사정

저 별들 이야기도 깜박깜박 쏟아지고

공연히 그리운 얼굴만 더듬더듬 내려온다.

 

얼마나 넓고 긴 강 거기 흐르고 있는지

젖는 듯 잠기는 듯 뭉게구름 노니는데

조용히 내 안 슬픔을 먼저 띄워 보낸다.

 

 


 

김재황(金載晃) 시인

1942년 만주 봉천 출생. 고려대학교 농학과 졸업. 1987년 <월간문학>에 시조 <서울의 밤> 이 당선 등단. 시집 <거울속의 천사> <바보여뀌> <민통선이여, 그 살아있는 자연이여> <못생긴 모과> <치자꽃, 너를 만나러 간다> <바람을 지휘한다> <잡으면 못 놓는다> 시선집 <너는 어찌 나에게로 와서> 등. 한국녹색시인회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