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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황 시인 / 못
애초부터 어디엔가 박혀야 될 운명이라면 그대 가슴에 파고들어가 믿음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그대 안에서 뼈대 같은 사랑으로 서고 싶다
-시집 『거울 속의 천사』에서
김재황 시인 / 그 이름 조선소나무
이 땅 어디를 가든지 마주치는 그대 얼굴 메마른 자리 골라 그 발끝 힘주어 딛고 바늘잎 내세운 뜻을 다시 새겨 바로 선다.
긴 그림자 짧게 끌며 언덕에 선 그대 숨결 미끈한 그 몸뚱이 수줍은 듯 홍조 띠면 춘양목 반듯한 가르마 푸른 정절 살아난다.
저 산 깎아지른 벼랑 올라가는 그대 모습 먹구름 낄 적마다 그 가슴 다시 조여도 조국의 예전 이름을 가지 위에 걸고 산다.
김재황 시인 / 동학사에서
골짜기 가린 숲에 머문 새는 멀어지고 꿈결에 뒤척이면 솔 냄새가 이는 바람 천수경 외는 소리만 기둥 위로 감긴다.
어둠을 밝혀 가는 믿음이 곧 하늘이라 구름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젖은 눈길이 고운 미소 남긴다.
그림자 끌던 탑이 별자리에 앉고 나면 버려서 얻은 뜻은 산 마음을 따라가고 숙모전 가려운 뜰도 물빛 품에 담긴다
김재황 시인 / 묵혀 놓은 가을엽서
하늘이 높아지니 물소리는 낮습니다 지나온 길 멀어지면 귀도 멀게 된다지만 이 밤도 지친 발걸음 젖어 닿는 그대 기척.
붉게 타다 떨어지는, 꼭 단풍잎 아픔만큼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껏 띄우지 못한 빛깔 바랜 나의 소식.
고요를 깨문 바람 가득 안은 한겨울밤 빈방 같은 내 마음에 녹차 두 잔 따라놓고 그 어둠 멀리 던지는 그대 손을 잡습니다.
김재황 시인 / 사는 길
눈 번쩍 환하도록 거침없이 만나는 것 스스로 그 마음이 휘어지게 가닿는데 누구도 내가 사는 길 막아서지 못한다.
꼭 맘껏 고르는데 바꿀 일은 없겠는가, 잘못을 알게 되면 얼른 옳게 고쳐야지 아무도 네가 사는 길 참견하지 않는다.
줄을 맨 코뚜레로 이리저리 이끄는 듯 하늘이 하라고 한 명령일 때 어찌하나, 온 힘을 한곳에 모아 앞으로만 달린다.
김재황 시인 / 만나면 절하다
세상을 살아 보면 만나는 게 고마울 뿐
기뻐서 마주 보며 서로 웃는 꽃이 된다
사는 게 별것 있을까 아끼는 일 그밖에
김재황 시인 / 단풍 이미지
뭣 때문에 그러하게 서두르며 살았는지 왜 그리도 사는 일이 바쁘기만 하였는지 물으면 어느 잎들은 붉은 물이 듭니다.
푸른 하늘 바라보기 부끄럽지 않았는지 주먹 쥐고 걷는 길에 베풀기는 잘 했는지 제풀에 어느 잎들은 붉게 젖고 맙니다.
김재황 시인 / 서울의 밤
서 있기만 하던 숲이 흔들리고 있다 지붕을 타고 내려 모퉁이로 기는 바람 불을 켠 포장마차가 밤거리를 흐른다. 한 순간을 잊어 보는 시름은 아직 남아서 뒤밟는 검은 영혼 그림자를 떨치려고 한 잔 술 취기를 입으면 앞서 가는 가로수. 갈라진 건물 틈새 절어 있는 주름진 때 달빛이 그늘을 일궈 밤벌레를 들춰내면 개구리 하얀 울음이 숯불 위를 걸어간다. 아득한 심연으로 수초 같은 혼이 잠긴 명멸하는 불빛들이 비늘처럼 박히는데 비비는 어둠의 소리 쓸려 오는 갈대 소리. 정해 둔 수심도 없고 열어 논 물길도 없다 드리운 꿈을 입질해 낚이는 허무를 따는 거리의 주정꾼 하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김재황 시인 / 까치놀
몸으로 종을 울려 맺고 풀던 그 참사랑 한 줌 잔영이 남아 은비늘로 박혀 들면 하늘귀 바다에 열고 회심곡을 듣는 자리.
김재황 시인 / 저 하늘을 바라보며
너무나 멀고 깊어 내가 닿을 수 있을까 그 물빛 너무 맑아 나도 머물 수 있을까 가만히 바라다보면 왠지 자꾸 눈물난다.
어둠이 깔릴 때면 더욱 감감한 속사정 저 별들 이야기도 깜박깜박 쏟아지고 공연히 그리운 얼굴만 더듬더듬 내려온다.
얼마나 넓고 긴 강 거기 흐르고 있는지 젖는 듯 잠기는 듯 뭉게구름 노니는데 조용히 내 안 슬픔을 먼저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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