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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란 시인 / 지중해
별장의 발코니가 키우는 바다가 있습니다 반달 오이와 깍둑썰기 토마토만 떠올리기엔 샐러드가 너무 한가합니다 포트 보방을 뜬 요트가 세공된 도시를 싣고 달립니다 침몰할 리 없는 바다는 말이 없습니다
한 뼘 건너 통역되지 않는 아우성이 그림 같은 닻을 올립니다 출항하는 노예선은 벌써 만선이었습니다 발 디딜 틈 없는 꿈이 장난감처럼 출렁입니다 총구와 허기 대신 지불한 손끝에 해진 목숨을 걸었습니다
벽에 걸린 바다가 종말을 싣고 떠다닙니다 피카소 박물관에서 걸어 나온 폭음이 입체적인 바다를 물들입니다 게르니카에서 목이 꺾인 아이는 엄마의 절규를 모릅니다 아무도 용서하지 않은 하늘의 별 같은 허물
낮아진 하늘이 샐비어처럼 타오릅니다 뒤집어진 파도 사이 버려진 인형들이 떠다닙니다 어둠과 한 몸으로 떠오른 외계인들을 하나둘 건져내는 노아의 방주 남루해진 비명이 한 마디 두 마디 요트에 실립니다
햇살 같은 요트가 분홍새우처럼 먹이고 입혀 뭍에 부려놓았습니다 몇 개의 모국어가 울음소리로 부서지는 혼혈의 바다 물과 어둠, 한 뼘 사이로도 해가 집니다 난파된 국적을 싣고 떠나던 꿈이 스스로 닻이 되어
닻줄에 휘감긴 닻이 되어 바다의 몸속에 정박합니다 가물대는 난바다 수평선에 막 태어난 섬들이 걸려 있습니다 적나라해진 바다가 알몸처럼 반짝입니다 파도에 밀려온 사망시점은 한 컷 뉴스의 송고 시간입니다
화려한 요트가 언제든 인출 가능한 잔고처럼 평화로운 물 위에서 그들은 기묘한 항로 위에 나란히 떠 있었습니다 고요한 어둠이 촘촘히 지워가는 물의 기억 그날의 노을이 샐비어보다 조금 더 붉어졌을 뿐입니다
이월란 시인 / 모래와 안개의 집*
주소를 발설하는 순간
솔솔 흘러내리거나 뿌옇게 모였다 흩어지는
속이 훤히 비치는 여름옷 같은 곳이었을까요 투명한 리빙박스 같은 곳이었을까요 우리가 꿈꾸던 그곳은
집이 없는 동네에서 태어나는 악몽을 꾼 뒤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선 지붕과 벽이 필요하다고 나눠가질 수 없는 땅 위에 각자의 집을 지으면 뾰족한 지붕 위에서도 터를 닦는다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일 줄 알고 사람들은 집을 지을까요
흘러내리는 것을 움켜쥐는 순간과 흩어지는 것을 다시 모으는 사이
여자는 투명이 더 투명해질 때까지 창을 닦고 남자는 날아오다 부딪힌 새의 사체를 쓸어 담는 곳이라고
하루 종일 잡초를 뽑다 허리를 편 순간 정갈한 정원이 아닌 뽑혀 나간 잡초였음을 들키지 않게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 서로를 가두는 곳이라고
이 집에 살다 간 사람들을 닮아가는 걸까요 그들이 떠나간 곳을 알 수 없으므로
여긴 따뜻한 곳이야 여긴 무성한 곳이야
벼룻집 같은 어둠이 칸칸이 쌓이는 방 하나쯤 어느 집에나 있다고 거짓에 변명을 조금씩 개어 쌓아 올리다보면 손바닥만 한 경첩으로도 언제든 열리고 닫히는 기억의 문 그럴수록 거대한 진실처럼 떠억 버텨주는 것이라는데요
빈터만 보면 뿌리를 내리는 습성으로 어제의 옆집으로 이사를 온 뒤 허물어진 귀퉁이로 들려오는 모래와 안개의 웃음소리
*Andre DubusⅢ의 소설 제목을 빌려옴
-시집 『바늘을 잃어버렸다』 (2023년4월)
이월란 시인 / 메멘토 모리*
꽃이 불을 만나 사라졌으므로 모니터에서 화약 냄새가 난다 살구 사진에 마우스를 대면 침이 고였다 늘 속고 있었다
독립을 선언하고 떠나버린 탄저균 같은 기억이 총기 난사하듯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독립은 누군가의 고립이었다
노란 불꽃이 부케처럼 터졌을 땐 생수에서 레모네이드 냄새가 났다 그럴수록 약속은 허무해지고 용서는 하찮아지고
개연성 없는 깜빡깜빡 3초 사이 트라우마에 잠긴 반신이 포탄 소리에 죽었다 깨어난다
뭐든 처음이었던 나는 이브였다 가득 쌓인 고허가 눈부셔 안간힘을 쓸수록 내가 여기 없었다는 부재의 증명이라고
뜨거워진 폐허 속에서 재를 뒤집어쓰고도 꼬물꼬물 일어서는 살아있음, 비눗방울을 잡으려다 엎어지는 이제 막 돌 지난 아기가 가슴의 돌을 가져간다 뭐든 입으로 가져가는 조막손을 잡고 먹음 안 돼요, 별빛 시린 두 눈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누구에겐지 모를 미안하다는 말이 구슬처럼 툭 떨어진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천국에선 엔딩노트 같은 자음과 모음을 가르쳐야겠다 아기를 붙들고 관속 체험을 한 듯 더 오래 밖에 있고 싶어진다 어딘가에 매달리고 싶은 벼랑 끝에서 아장아장 걷다 손익은 무덤가에서 터지는 웨딩 불꽃
비뚤게 주차된 차를 보고 짜증이 나던 날 나의 차도 비뚤어진 걸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사이드미러를 조금 움직여 사각지대를 줄여본다
어둠이 발라낸 7월의 사막 더 이상의 식민은 없다고 단청 입은 하늘이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귀마개를 쓴 아기를 꼭 껴안아 본다 허구가 아니다 마더 구스 책을 들고 까딱까딱 춤을 추는 아기 옆에서 나는 나무다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로 유혹하는 사과나무, 불에 타지 않게 그늘을 키우는 꿈을 꾼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는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이월란 시인 / 詩똥
온 몸이 항문이다
별을 보면 별똥이 마렵고 꽃내를 맡으면 꽃똥이 누고 싶다 인분이 때론 너무 독한 거름이라던가 진실을 똥처럼 끌어 덮는 인간들에게 글발 독한 똥물 세례가 퍼부어지기도 한다는데
온갖 천태만상들을 눈에 넣었어도 시린 가슴팍에 고였다 나온 탓인지 눈으로 나오는 눈물 똥은 언제나 맑고 투명하다 사지로 뜯어 먹은 분기탱천했던 욕기들 삭고 또 삭아 고물고물 기어 나온다
쉽게 곤비해진다는 오감 중의 후각 똥을 싸다가 자기 똥 냄새가 역겨워 화장실을 뛰쳐나온 인간이 어디 있다던가 오늘도 지린내 풍기며 싸놓은 마음의 똥들이 쿠린내에 만성이 된 코앞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글방에 쌓이는 저 똥들을 언제 다 퍼낼꼬
이월란 시인 / 바늘을 잃어버렸다 -붉은 점과 핏방울이 만나 바늘이 된 이야기입니다
작고 반짝이는 것을 주머니에 넣고 싶었던 어린 마음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같은 방향만을 고집하던 손가락이 뾰족해지면서일까요 자라면서 가늘어질 수밖에 없는 질량불변의 법칙 때문이었을까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 찬 세상이니까요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다 보면 잃어버린 것을 닮아갑니다 어딘가 찔려 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한순간도 뛰지 않으면 허물어지는 심장을 타고난 이래
잡히지 않음이 모두 반짝이는 통증으로 수렴되는 사이 침대 위에선 악몽이 되고 맨발은 위태로워집니다 봉합되길 원하는 벌어진 곳 어디쯤
잎겨드랑이를 뚫고 오르는 바늘꽃처럼 만발해집니다
한 걸음씩 뒤로 가보아도 몇 바늘 꿰매다 놓쳐버린 상처 위에서 다시 제자리에 꽂지 못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실 끝을 잡고 끊임없이 풀어내다 보면 그 끝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난 길들을 거스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오래 찾을 수 없는 거라면 이미 몸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죠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든 날은 더욱 의심스러워집니다 혈관을 흘러 다니다 튀어나온 순간의 진실에 찔려도 좋을
온몸이 따끔거리는 번식의 계절 보이지 않는 곳에선 물고기 한 마리 낚이고 있을까요 생리통에 몸이 구르던 어린 방바닥은 모래밭처럼 넓어집니다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주사약이나 바람이 통과하는 미로처럼 빈 술통 뚜껑을 향해 던지던 부러진 화살촉처럼 단도보다 은닉하기 좋은 암살용 무기처럼 독이라도 발린다면 대단해지는 위력이 따라다닙니다
잃어버린 것이 바늘만 아니었어도 정말 행복했을까요? 아직 오지 않은 통증은 만약이라는 약을 자꾸만 떠올립니다 잃어버린 뾰족함 꼭 그만큼씩 뭉툭해져 가고 있습니다
-시집 <바늘을 잃어버렸다>에서
이월란 시인 / 하늘다람쥐의 수명이 짧은 이유
죽이지만 않는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흑백 사진 같은 하늘을 두고 왔다 녹지 않는 얼음 같은 긴 겨울을 두고 왔다 백골처럼 살을 버린 땅에서도 탯줄 같은 족쇄 사이 붉은 두 발이 자라고 있었다 떠도는 무연고의 기억 속에서 숨겨둔 요새의 열쇠 같은 사상 한 줄씩 들키며 산다
세습된 허기 앞에 앉을 때마다 나만 숭배하고 싶었다 아무도 감시받지 않는 비무장지대, 내가 만든 감옥에만 오래오래 갇히고 싶었다 전단지에 새겨진 나라는 풍선과 함께 터져버렸다 타이레놀과 거짓이 섞여있을 거라고 미래로 오고서야 내가 없다는 걸 알았다
철책을 넘어와 지루해진 자유가 걸리적거린다 세상 어디에서도 떠도는 혁명을 한 줌씩 손에 넣었을 때만큼 얼어붙은 경계를 맨손으로 건넜을 때만큼 간절해지지 않는다 몇 개의 커브 길을 돌아 동그라미에 갇혀버린 다람쥐 한 마리 겨울잠에서 깨어나 체의 몸이 되어간다
여기는 사형당하기 좋은 사각지대, 부르주아의 사상탑 같은 촛불 한 점 비루하다 꽃잎도 새도 어찌 북으로만 날아가는가 아지랑이 같던 꿈의 초안을 찾을 수가 없다 어젯밤 가장 인민적이고도 가장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부고를 베껴두었다
나의 심장이 나라를 버렸듯 나의 봄은 이제 나를 버린다
-어느 유타 탈북자의 유서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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