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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탁 시인 / 구름 편지
구름 편지 받아보신 적이 있는지요 스치는 바람에 실려 오는 건 다 아시겠지만 가끔 빨랫줄에 걸리기도 하고, 빈 참치 통조림 캔 속에 들어오기도 하고, 잠자는 아기 손에 잡히기도 하고, 고양이털에 날려 오기도 하고, 드디어 발바닥을 떠받들며 푸른 바다까지, 끝임 없이 구름 편지가 와요
구름 편지는 비처럼 내려 씨앗처럼 자라나요 씨앗은 빨리 자라나 빨랫줄을 들어올리고, 씨앗은 뾰족하여 통조림 캔을 뚫고 참치를 바다로 보내고, 씨앗은 딱딱해져 아기를 태우고 목마처럼 달리고, 고양이는 구름을 돌돌 말아 먹고, 드디어 씨앗은 너무 빨리 자라나 하늘까지 올라가요 아, 그렇다고 하늘을 바라보니 편지가 둥둥 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냥 끝없이 끝없는 구름 편지가 와요
김영탁 시인 / 왼손을 위한 협주곡
오른손이 바닥을 치자 음지쪽 고사리로 움츠려 있던 왼손이 새싹으로 돋아나 말풍선을 만드네
눈길에서 언제나 벗어나 있던 음지의 말이 튀어나와 귀를 간질이고 잡아당기네 왼손이 이끄는 대로 유랑하는 발길은 용문龍門을 지나 별빛 쏟아지는 사막으로 갈 거라네 용녀龍女의 젖가슴 위에서 흔들리는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 왼손으로 문을 열면, 외팔이 악사의 마골호 켜는 소리에 오른손은 희미한 옛사랑의 통증을 느낄 거라네 악사와 독주를 마시고 이별하겠지 하얀 사막의 밤을 지나 별빛이 점점 여명으로 스러지고 사막의 물이 마른 걸 보니 용녀는 떠나갔을 거라네
드디어 나도밤나무 앞에 서서 죽은 가지를 오른손으로 삼고 살아서 뻗어 있는 가지를 왼손으로 삼아 그녀가 떠나간 쪽으로 돌다가, 다시 그녀가 올 거라는 기다림 쪽으로 돌아가면, 희미한 옛사랑의 오른손이 위로하는 술잔에 왼손은 독주를 철철 넘치게 올리고 나도 이제 나도밤나무 하나쯤 안아 보고 싶어질 거라네
*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서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음악과 김승희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에서 제목을 빌려 옴.
김영탁 시인 / 나무의 편지
나무는 일생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사실을 나만이 몰랐네 그저 편지를 보내면 낙엽인 줄 알고 빗자루로 쓸기만 했네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나무는 봄의 전령으로 꽃편지를 띄우고, 여름이면 초록 볼우물에서 시원한 우물을 퍼 올리듯 편지를 쓰고 가을이면 끊임없이 편지를 부치는 나무, 겨울엔 무장무장 눈을 맞으며 봄에 부칠 꽃편지를 쓰느라 지쳐 겨울 곰처럼 잠이 들기도 하네 이제야 나무에게 편지를 쓰는 밤, 하이얀 종이를 사랑하듯 사각거리는 연필은 오래전에 떠난 이들을 나무에게로 불러오고 세상의 나무들은 그리운 이들을 편지에 보내네
-엔솔로지 『한국시인』(한국시인협회, 2023) 수록
김영탁 시인 / 떨림
국민학교 때 금자金子가 국어 교과서를 읽으면 떨렸다 그 목소리와 몸이 얼마나 떨리는지 김씨金氏 미곡상米穀商 도라꾸 조수가 시동 걸려고 엔진 구멍에 쇠파이프를 넣고 온몸을 시계 방향으로 잡아 돌리면 더벅머리 조수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사람이 먼저 시동이 걸리고, 이윽고 도라꾸는 우당탕거리며 시동이 걸리는데 그때 도라꾸 떠는 모습은 금자에게 훨씬 못 미쳤다 얼마나 떨리는지 책상과 의자가 떨고, 이어서 흑판과 주전자도 떨고, 전교생과 교감 교장까지 떨고, 드디어 국민학교도 떨고 나무와 새가 떨고 바람도 떤다
그 이후 떨림은 사라지고 너도나도 무대 위의 연기파, 떠는 건 없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떨림도 까마득해져 어쩌다 떠는 건 떤다는 약속으로 떨고 미아리고개 방울도사 복채 받고 떨고 그 떨림은 어디로 사라졌나 번개처럼 지나간 떨림
김영탁 시인 / 다시 북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북 소리에 빠져서 한 사람 한 사람 나무가 되어갈 때, 음악이 흘렀다 음악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졸고 있는 사람과 책에 눈알이 빠져서 눈알을 찾고 있는 사람과, 나무를 꿈꾸지도 못하고 나무를 못 본 사람들과 나무가 된 모든 사람을, 전동차 천정까지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내동댕이쳤다가, 제자리에 앉혔다가 제자리에 서 있도록 했다가, 북나무 아래로, 음악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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