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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숙 시인(은월) / 고향집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7.

김혜숙 시인(은월) / 고향집

 

 

명절의 고향집은

식솔들이 우르르 바리바리

손에 들고 오는 물건보다

반가운 얼굴 한 번 보는 날

 

현관 댓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발 중 하나

마당에 개가 몰고

숨겨버린 가난

돈 못 버는 아들의 케케묵은

구두 한 짝 볏단에 숨겨진

거름 향에 섞인 그 냄새를 쉽게

찾을 수 있어 어머니는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추위에 밤새 별이 쏟아지듯

고향집 다복한 부유란

그렇게 가난한 집 둘레를

감싸고 웃음이 쌀을 씻고

 

휘영청 밝은 둥근달은 흔들리는

굴뚝을 끌어안고 차가운 방구들을

데운 어머니는 사랑 하나 더듬고

사랑 하나 토닥이다 새벽닭이 울자

슬렁 술렁대는 새 떼를 맞이했다가

훨 날아가듯 뜰이 한둘 횡 비워낸다

 

모두 쏙쏙 빼가고 해는 중천에

들 때쯤 아랫목에 벽장을 보고

누워있는 텅 빈고향 집

 

 


 

 

김혜숙 시인(은월) / 지나고 보면 다 꽃피는 때였다

 

 

잠시 동면에 들어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잠들다 또다시

피는 날이 있다는 것만도

숨이 쉬어지는 일

 

지면을 들썩이는 때가

멀지 않으니 좀더 인내하는 것

살아 있음에 할 수 있는 것

존재감 없어도 존재를 꿈꾸는 일도

공기층에 비집고 있는 그 무엇의 힘

그것 때문에 없는 존재감도 숨 쉰다

곧 꽃 피는 날이 온다

 

 


 

 

김혜숙 시인(은월) / 감꽃

 

 

밤이 어둠 쫓아 내빼가고

앞마당에 누군가 밤새 꽃무덤을 두고 갔네

 

얼마 전에 편지를 썼던 유년의 봄은

감꽃이 피었다 한 것 같은데

 

누런 포장지엔 감꽃이 무늬져

그리움을 데리고 우체부 자전거가

놓고 간 소포와 함께 툇마루에 앉아 있네

 

우주를 떠돌던 내 유년의 감꽃은 입속엔

달콤했지만, 혼자여서 떨떠름하고 아팠네

 

 


 

 

김혜숙 시인(은월) / 호두를 두들기는 여자

 

 

밤마다

몰래 도깨비

방망이질을 한다

 

곱씹고 곱씹은 낱말은

호두 속에서 널브러지고

 

고랑을 타고 도는

내 언어들이 들어차

구린내를 풍긴다

 

쭉정이와 가라지가

분별없고 대책 없는

천식 걸린 기침

무시로 터져 나온다

 

몸부림치며 뱁새눈을

뜨고 서로 노려보던

사투 끝에 조각난 낱말

 

늙은 여자의 주름은

호두 속에 고랑 틈에서

허망하기가 그지없다

 

 


 

 

김혜숙 시인(은월) / 겨울나기

 

 

언덕길을 밀고 가는

손수레가 미끄럼을 타고 간다

 

어느 사이 두 발을 저절로 밀고와

골목어귀에 수레를 놓고

볼살이 터지고 아픈 찬바람에

태우다가 태워가는 헐벗은 몸으로

오돌오돌 떨던 가로등 푸름한 연기아래

 

귀갓길 어귀에 삶의 요동으로 부터

군밤 몸을 힘껏 부풀려 겉옷에 단추가 틔울 쯤

군고구마의 가난한 누더기를 벗기는 즐거운 손길

바쁘게 이루어지는 풍요와 가난이 교차하는 겨울

 

왠지 모를 증오가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오히려 속은 든든히 채워지던 퇴근길

헛헛함과 가난함을 달래 주던 그 마음의 따뜻한 온도

너와 나의 오가는 똑같은 마음 한자리

 

 


 

 

김혜숙 시인(은월) / 반야사에서 날 봤네

 

 

타고 타는 정염을

타이르다 못해

어쩌자고

절 마당에 토해내고

 

붉게 붉게 끓어오르는

번뇌 벗어나지 못해

속세를 떠돌던 수호랑이

다시 찾은 반야사

 

산발이 된 온몸

가지런히 차려입고

백 년을 살 것 같이

백일을 찔러내는 심장 하나

배롱나무꽃 아래 묻었네

 

 


 

김혜숙 시인(은월)

2013년 계간 <서울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대시인협회' 간사, '서울문학 문인회' 이사, '우리시' 회원, '시가 흐르는 서울 낭송회' 이사, 현대시인협회 간사로 활동. 시집 <어쩌자고 꽃> <끝내 붉음에 젖다> <아득하고 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