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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정규 시인 / 개망초꽃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8.

박정규 시인 / 개망초꽃

 

 

용문사 가는 길에

야인들의 묵언수행 같은

지천을 밝히는 작은 생명들이 있었다

 

이 땅의 어둔 곳을 가리고

노동의 새참 같은 프라이

계란꽃들이 속살을 보시하고 있었다

 

화려한 국화꽃 관심 밖에서

가녀린 몸을 일제히 던져

민초들의 하얀 눈물을 대변하고 있었다

 

-계간 리토피아 2012. 겨울호(통권48호)

 

 


 

 

박정규 시인 / 내 고향 남해

 

 

할머니 얼굴 주름살 골을 타고 달려온 버스가

마중 나온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싸-한 바다냄새 비늘처럼 일어나 차창을 두드린다

산허리까지 올라선 다랑이들 가슴에

노니는 물안개가 도솔천 대문을 지키고 있다

파릇파릇 마늘 농심 꿈으로 키우는 동면 잊은 다랑이들

대장군 여장군 우뚝 서있는 남해대교 두 팔 뻗어 반기고

방파제 깨우는 파도 거품 위를 비상하는 갈매기들

통통 고깃배 넘나드는 해전포구 노량바다 거북선 지킴이

세속에 발 담지 않은 처녀 허벅살처럼

뽀송뽀송 싱싱한 횟집 아줌니

꼴뚜기 병어회에 묻어나는 인심

망운산골짝 깬 청옥 같은 물줄기

뿌리 이어 내려오는 맑디맑은 내 고향

할아버지께서

토담 치고 옹기 모아 둥지 튼 보금자리

할머니 쌈지 속에 콧물 묻은 지폐처럼

밟아버린 세월 저편 아련한 추억들

삶의 주머니에 꼬깃꼬깃 숨었다가

겁 없는 망아지처럼 버스 안으로 뛰어든다

버스는 꼬불꼬불 시간 속을 달리건만

차창 밖 어린 세월은 새치만큼씩 마음 안을 키운다

아, 언제나 안기고픈 비릿한 흙냄새 마늘향기

토끼반도 남쪽 바다 한려공원 중심에서

청정해역 출렁이는 내 고향 남해

 

-첫시집 <탈춤 추는 사람들> 중에서 재수록.

 

 


 

 

박정규 시인 / 걷이

 

 

어수룩한 길을 수십 년 돌아와서

귀밑머리 하얗게 색이 바래

산밭 언덕에 메뚜기처럼 앉아 땀을 식힌다.

 

고왔던 짝과 가을을 캐러 온 밭에는

푸른 오솔길에서 함께하던 청춘이 있고

어머니가 불러주던 사랑이 이랑마다 스며있다.

 

마음에서 불러지지 못한 구름은 하늘에 있고

마음속에 붙여진 가을이 들판에서

제 몫 다한 듯 벌거벗어 가는구나.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2월호 발표

 

 


 

박정규 시인

1960년 경남 남해군 출생.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탈춤 추는 사람들』 『검은 땅을 꿈꾸다』 『내 고향 남해』.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현재 리토피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