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우 시인 / 박지도
신은 섬 하나를 남몰래 지었다 뚝 딱 삽질 한 번으로 섬의 갈비뼈를 빼내 섬을 만들었다 참 보기 좋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큰 섬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작은 섬은 원망이 깊었다 내밀한 속사정을 품고 새들은 자랐고 견디는 일은 생활이 되었다 폭설에 갇혀 불통이 지속되면 불만은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화롯가에 고구마가 익어가는 밤이면 입담 좋은 사람은 한 편의 픽션을 각본 없이 무대에 올렸다 마음으로 길을 놓았던 두 스님의 사랑은 바다 위에 길을 놓는 일이었다 마음은 조급했고 노역은 고단했다 여왕개미처럼 혼인비행의 꿈을 꾸었고 두 스님은 바다에서 마침내 사랑을 확인했다 밀물이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물때를 조심하라 방심은 위험하다 수차례 경고도 아랑 곳 없이 순식간에 바다에 수장되고 전설은 엔딩으로 처리됐다 섬은 그래서 설움의 줄임말이다
박선우 시인 / 김환기 생가에서
그는 무엇을 위해 하늘에다 별자리 하나 만들지 않았을까? 그의 유년 꿈속은 색깔을 단정할 수 없는 바다와 의문부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달과 별 그리고 사철 아궁이에 불을 댕기는 어머니 바다를 건너와도 꿈속을 떠돌던 이미지는 더욱더 선명해져서 집착이 우후죽순 자라났을 거다 숭숭 뚫린 가슴에 황량한 바람이 부는 날 기흉처럼 추상화가 부풀어 올랐을 거다 그의 가슴엔 자신 만의 바다가 살고 있다 그제야 알았다 바다가 하늘이라는 것 여자의 둥근 배는 달이라는 것 무수히 박혀있는 촘촘한 별들은 무엇이 되어 만나야 할 너와 나라는 것 부제가 필요 없는 그의 화폭에서 그의 생과 사를 읽는다
박선우 시인 / 방치
1급수에 사는 물고기다 서식지는 얼추 알겠는데 태생지는 오리무중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은 해안가 수질 좋은 자리, 최신식 요양병원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방치들 함몰된 볼 안에 알사탕을 굴리며 후박나무 아래서 흐릿한 표정을 말리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헤엄쳐 왔는지 언제 어디로 돌아 갈 건지 알지 못한 채 탄력을 잃어버린 눈동자로 허방을 본다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가 된 방치들 부레 속 공기가 모자라 멀리 갈 수 없다 몸에 번져가는 검버섯 무늬가 기억까지 잠식하면서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방치는 웃는다, 또 웃는다 그러다 속으로 운다 그 어떤 마지막도 두렵지 않다는 듯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아가미 절반을 잃고 수심 깊은 물살을 따라 표류한다 살고자 안간힘을 썼던 게 싫어서였을까 말더듬이가 되었다가 마침내 입을 닫아버린다 오늘은 방치가 방치를 위로하듯 방치를 본다 다른 방치 한 마리가 끝끝내 병원을 빠져나갔기 때문 장례식에 조문도 할 수 없는 울 수도 웃지도 못하는 눈동자들 잠시 흔들렸다가 시선을 금방 거두어 버린다 오래 오래 기억하면 더 많이 아프기 때문 그렇다, 이곳에서 방치들은 남몰래 망각을 먹고 산다
-무크 『목포문학』 2023년 하반기호 발표
박선우 시인 / 바다횟집
서너 평 수족관 바다의 서사를 지느러미로 쓰고 있는 농어의 비린 필체가 활처럼 휜다 물살, 물에도 살이 있다는 말 마지막까지 실감한다 뜰채에 잡힌 부력이 곧바로 허공과 충돌 한다 낯선 눈동자들이 숨통을 조여 오니 헐떡거리기 시작하고 물의 지문을 따라 회귀했던 어미의 대한 기억이 거기서 끝났다 탁, 그녀의 칼끝은 타이밍이다 기억을 잘라내는데 가차가 없다 물결무늬로 각인된 농어의 동공이 풀리고 칼끝은 빠르게 부위별로 해체 한다 쫄깃한 공복을 느낀 바람이 살점 하나를 물고 바다로 내빼고 있을 동안 포를 뜬 살점이 그녀의 칼끝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죽음의 무늬가 저렇게 맑고 투명할 수 있다니 그 현란한 해체 앞에 사람들의 눈은 싱싱해지고 만다 그러나 그녀가 삼십 년 넘게 되풀이 한 건 물고기 칼도마 접시만은 아니다 망각이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비롯됐다는 비난 속에서 바다가 남편을 삼키고 자식이 소식을 끊어도 참고 참아도 되살아나는 울분이 있어 팔딱거리는 기억을 잘라내고 있는 거다 반복이란 무서운 것일까 사람들은 아무도 과거를 묻지 않고 손놀림만을 본다 다만 그녀가 저 혼자 있을 때 몸뚱이를 잃은 어두(漁頭)처럼 하늘을 본다는 걸 죽음을 앞둔 물고기들만 알 뿐이다
-2017년 제11회 전북 해운문학상 대상 수상시
박선우 시인 / 만구음관*
내간체로 쓴 아내의 서신 연민으로 시작해 염려로 끝난다 울분은 약도 없어 해독도 불가능하다 좆같은 세상, 허공에 소리를 지르면 허공은 니가 조옷 같다고 비아냥거린다 낙담이 번식하는 거처를 벗어나 바다 앞에 선다 파도가 찰싹찰싹 여자처럼 안긴다 허허허 호호탕탕 웃음을 내지르면 해서체로 누웠던 바다가 허리를 일으킨다 갈매기들 푸드득 푸드득 날개를 편다 사내는 울분을 “만구음관”이란 표제로 바꾸고 뒤뜰 매화도 윗목에 들인다 만 마리의 갈매기 흉문을 물어 와도 매화에게 위로주 건네며 주거니 받거니 하니 이 모든 생각은 꽃으로 치환된다 붓끝에 매달린 꽃잎 한 잎 두 잎 상징을 품은 채 종이 위에 피어난다 사내는 불현 듯 줄기를 뻗게 한다 침착하게 가지가 늘어 날 때마다 한 병의 술이 비워지고 매화 속엔 수백 년 된 옹이가 박힌다 붓을 놓은 사내의 자태 그윽하고 향기롭다
*신안군 임자도 조희룡의 적거지
박선우 시인 / 순비기꽃
노인은 눕기를 거부했다 순비기 순비기, 꽃만 찾는다 의사는 기억이 생시가 될 때 고집이 자란다고 했다 육지 사람들은 모른다 바닷가에 살던 여자만이 비밀을 안다 비다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꽃의 방향 여자들은 대부분 낮은 포복으로 바다를 향해 뻗어 가느라 향기를 모르거나 잃는다 뼈아픈 향기가 뚝 뚝 다 떨어진 자리 여자들의 몸속에는 꽃의 전설이 도진다 노인의 촉수가 오늘도 바다를 향하고 있다 햇볕 쨍쨍한 날엔 시들하다가도 바다가 토해내는 숨결 한번에 부력으로 망울을 틔우는 본능 그러나 내밀한 수문 같은 꽃의 대답이 황홀하게 달려오지 않는다 노인은 끝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저 혼자 아무 때나 개화하는 무색무취의 집착 순비기 순비기, 그것이 죽은 딸의 이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2017년 열린시학상 수상시
박선우 시인 / 바지선
바지선 옆구리를 치는 파도가 사납다 일몰은 순식간에 바다로 몸을 버리고 건너편 목포항엔 흐릿한 불빛 몇 개 조난 신호처럼 깜빡인다 그물을 내릴지 말지 불안이 휘청거린다 목련지고 벚꽃 흐드러지게 피면 실뱀장어 몰려오는데 정박이 길면 생계에도 녹이 끼기 마련 닻은 내릴 때 보다 올릴 때 더 가볍다 출항의 기미를 알고 있는 것들은 매번 솔직하다 어군탐지기로는 감지할 수 없는 치어들의 몸짓 언제나 생의 방향을 잘 읽어야한다 경험을 한 번 더 믿기로 한다 파도를 밀치고 조류와 조류가 만나 기미가 된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빠르게 길그물을 내린다 그물이 촘촘한 물의 질감을 헤치며 퍼진다 중심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낮에 먹은 라면국물이 올라온다 선실 안에 집기들도 난동을 부린다 찌그덕 삐거덕 텅 텅 소리가 고막을 유린한다 해도 이제는 파도와 한 몸이 될 수 있겠다 기다릴 수 있겠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전부 물고기자리로 보인다 -2017년 열린시학상 수상시
박선우 시인 / 은사시나무 숲에서
빗방울이 스타카토로 음색을 바꾼다
은사시나무잎 앞면과 뒷면이 리듬에 따라 몸을 뒤집는다
온음일 때도 반음일 때도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다
때론 스텝이 꺾여 휘청거리지만
무희처럼 팔랑팔랑 보일 듯 말 듯 관능적이다
젖은 곤줄박이 한 마리 날개를 턴다
독주를 시작한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총총 걸어 다니는 낮은 옥타브
노인들이 절반인 마을에선
그것도 음악이다
쉼표이다 새의 지문은 법령이 되고
은빛 온기가 무럭무럭 숲을 키우고 있다
-2023년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 수상시
박선우 시인 / 임자도, 홍매화에 매혹되다
죄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순백의 눈보라는 꽃이 되어 수피(樹皮)의 온기들을 방전시키고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나무의 전생을 지우려 한다 온갖 잡다한 유언비어들이 꽃밭에 난무하고 화원은 아예 출입을 봉쇄하고 소리를 감금했다 노동이 빙하가 되고 달이 몰락하는 저녁 부음을 전해 들은 꽃가지에 슬픔들이 조등처럼 걸린다 우봉 조희룡은 달의 무덤 앞에서 제례를 올린다 나무들이 아가미를 열고 하늘을 품는다 별의 사리들이 지상으로 쏟아지고 허공의 음계를 밟고 꽃으로 건너온 슬픔의 밤이 꽃을 수습한다 몰락한 달이 차오르고 있다 달의 무덤 앞에 붓을 든 선비 화선지에 뼈만 남은 서사가 꽃으로 피어난다 그 홍매화를 화폭에 담은 우봉 조희룡 임자도, 홍매화에 매혹되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진수 시인 / 독야 청청 외 7편 (0) | 2025.08.27 |
|---|---|
| 김혜숙 시인(은월) / 고향집 외 5편 (0) | 2025.08.27 |
| 이건우 시인 / 라자루스 외 5편 (0) | 2025.08.27 |
| 김루비 시인 / 자화상2 외 4편 (0) | 2025.08.27 |
| 박수중 시인 / 흑백시대 외 5편 (0) | 2025.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