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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루비 시인 / 자화상2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7.

김루비 시인 / 자화상2

 

 

노고단 모질지않는 능선에서

품어둔 각시 투구꽃

 

간절히 기다리는 고개짓인가

청보라의 얼굴

 

백두대간 달려온 바람

나비떼가 가루비누처럼 날리는 사이

 

하늘을 받들고

왕관을 쓴 자태

 

우리가 별에서 만났는가

나의 물음은 고백보다 진지해서

 

하마터면 울뻔했다

몇 개의 색채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김루비 시인 / 가고 싶다, 길을 만나면

 

 

몸의 구멍은 길이다

 

줄지어 선 자작나무는 보헤미안의 음표다

 

신기루에 잠기다가 빛의 뒤꿈치를 돌아

알프스 오르다가 치마폭을 흔들다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함을 만나

마음조차 가벼워지고 싶다

 

흐르는 강물 소리에도, 겨울 가로수에게도

발걸음을 보여주는 길

 

길은 누군가에게 연주되는 기다리는

악기 같아서

내 안에 집시를 가둔 나는

가고 싶다, 길을 만나서

길이 되기 위해

 

 


 

 

김루비 시인 / 수련

 

 

주섬주섬 챙겨 넣은 호주머니

속에서

 

물의 주름살이 만져졌다

 

호수 위에 깔리는 물살은 그냥 두고

 

바닥의 진흙에 숨겨진 반란의

꿈이나 건져 올려 볼까

 

토우의 눈 속에 담아둔 기도가

뜨겁게 꽃으로 핀다

 

 


 

 

김루비 시인 / 비가 데려온 봄

 

 

용문사 홍매가

봄비를 피우고 말았네요

 

꽃이 나무를 피우는 가지 아래서

보았어요. 당신

 

발길 닿기 전

 

난분분

붉다 지친 꽃잎

바위에 동여 묶던 내 마음 곁에서

던져지고 있네요

 

 


 

 

김루비 시인 / 물박달나무 껍질을 읽다

 

 

이리저리 뒤엉킨 비탈의 자리에

가장 먼저 눈이 내린다

발라먹던 고등어의 살점 같은

몸 속 어딘가에 가시를 숨긴 것 같은

물박달나무 몸피 비워낼 때

파열음새떼의 깃털 아래서 눈은 은빛이다

 

애당초 너와 난너트와 볼트로 꽉 조인 몸

온전히 소리를 질러대기 위해

물박달나무의 허연 내장을 가른다.

너에게 이르는 길 한 가운데

내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겹겹의 시간을 붙여놓은 포스트잇 때문이다

 

못 견디게 너덜거리는 껍데기가

등 가려운 산짐승의 모공을 긁어주자

떠돌고 떠도는 눈꽃은황홀한 건반으로

떨어지는 날갯짓이다

 

오래도록 구름을 빨아들인 키 큰 물관은

한 동이 물을 마신 뒤에도 목이 마르다

젖어도 자작거리며

자작자작 소리를 삼키며

눈은 내려서 터진 살갗에 닿는다

 

 


 

김루비 시인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졸업. 2016년 계간 《문장》 신인상 등단. 시집 『빨간사과는 열쇠 가게다』. 대구미술가협회, 대구시인협회회원. 형상시 문학회 회원.